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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바다

김민수 (서울북노회,한남,목사) 2010-06-20 (일) 06:54 13년전 4959  

에바다(막 7:31-37)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귀가 먹고 말이 어눌한 사람을 고쳐주신 기적이야기입니다.

기적 중에서 가장 큰 기적은 무엇일까요? 저는 개인적으로 사람이 변하는 것이 가장 큰 기적이요, 그중에서도 하나님을 믿는다고 착각하면서 살아가던 사람이 진짜로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많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뜻과는 정반대의 길을 걸어갑니다. 조금 안다는 것 때문에 오히려 모르는 사람보다 더 많이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일을 합니다.

꽃을 좋아하다 보니 꽃을 찾아 떠난 여행길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현장에 가보면 꽃을 좋아하신다는 분들이 꽃에 가한 폭력의 현장을 종종 보게 됩니다. 사진 한 장을 찍으려고 뽑아서 다른 곳에 옮겨놓고 찍는 것은 물론이요, 다른 사람이 찍지 못하게 하려고 꺾어버리기도 합니다. 희귀종은 몰래 캐오기도 하고, 때로는 집에서 키운 것을 자연에 가져다 놓고 새로운 종을 찾았다고 하기도 합니다. 학계에서 이름이 있다는 이유로, 제자 혹은 다른 사람이 발견한 것을 자신이 발견한 것처럼 학계에 보고하는 일도 있습니다. 이런 일은 ‘꽃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도 맨 처음에는 꽃을 사랑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꽃은 그 사람의 명예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 것입니다.

신앙인 중에도 이런 사람들이 많습니다.
역사적으로 한 예를 들면 미국의 전직 대통령인 ‘조지 부시’와 같은 사람입니다. 그의 신앙적인 뿌리는 ‘기독교 근본주의’입니다. 그 신앙을 근거로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무고한 약소국가의 국민과 자국 젊은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이 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슬람국가를 초토화하고, 동시에 자신의 정치적인 이익을 얻겠다는 속셈입니다. 그는 전쟁을 일으키기 전에도, 전쟁이 진행되는 중에도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으로 잘 알려졌습니다. 아직 진행형이지만, 조지 부시는 역사에 추악한 전쟁의 원흉으로 기록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는 22일, 6·25전쟁 60주년을 맞이하면서 대형교회 중심으로 평화 기도회를 하는데 주 강사로 조지 부시를 초청하고 그의 간증을 듣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함께 강사로 나선 사람들은 조용기 목사, 김장환 목사, 김삼환 목사 등 교계에서 내로라 하는 사람들이요, 자칭 교계의 지도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과연, 무엇을 위한 기도회인지 모르겠습니다. 일일이 예를 들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만, 보수대형교회를 중심으로 구성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의 경우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창조세계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4대강 사업 같은 것도 지지하는 성명서를 냅니다. 그러면서도 4대강 사업 반대를 외치는 종교단체에 대해서 정치적인 활동을 하지 말라며 타이릅니다. 이런 사람들이 변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일 것입니다.

‘에바다’는 ‘열려라!’하는 뜻입니다.

열림(OPEN)은 닫힘(CLOSE)과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90년대 후반부터 교육계에서는 열린 교육이 유행처럼 번졌습니다. 열린 교육은 과거 입시위주의 교육이 가진 폐해를 극복해 보고자 하는 시도였습니다. 입시위주의 교육은 모든 초점이 일류대학에 맞춰져 있다는 점에서 닫힌 교육이요, 창의성을 키우지 못하는 교육이므로 열린 교육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후, 열린 교육은 봇물처럼 퍼져 나가는 것 같았지만 지난 20년 전과 오늘날의 제도교육을 비교해보면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교육의 양극화만 심화하였습니다. 왜 그렇게 되었습니까? ‘열린 교육’을 통해서 일류대학에 많이 진학했다고 하니까 학부모들이 몰립니다. 결국, 그 학교는 입시명문이 됩니다. 일류대학에 대한 갈망은 우리나라처럼 왜곡된 교육구조와 사회구조를 가진 나라에서는 여전히 일류대학 졸업장이 주는 매력이 상당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우리 사회는 이런 일류대학 병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어느 대학을 나왔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사람이냐가 중요시되는 시대가 올 것입니다.

 

우리 마음에 ‘에바다’의 기적이 일어나길

 

닫힌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면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마음이 닫혀 있으면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왜곡된 형태로 보게 됩니다. 이웃, 자연, 하나님을 닫힌 마음으로 보면 자신의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열린 마음으로 보면 이웃, 자연, 하나님이 어떻게 나와 연결되어 있는지 보이게 됩니다. 여기에서 기적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다.’라는 것은 어떤 일의 시작입니다.

히브리서 믿음 장에서 ‘믿음’은 무엇입니까.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실상, 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 믿음은 본다는 것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은 현대 과학이 말하는 객관성과 합리성만으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과학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지나치게 현대과학을 의존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은 삶의 태도인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마음이 열리면, 열린 마음을 갖고 살아가면 마음의 눈이 뜨입니다. 그 눈으로 바라보면, 직관적으로 옳고 그른 것이 분별 됩니다. 그것이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입니다. 그러나 이 하늘로부터 오는 지혜를 가졌다고 해서 다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이제는 옳고 그름을 분별했다면, 옳은 일을 위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사회라면, 혹은 하나님 나라라면 선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잘살아야 하지만 비정상적인 사회에서는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멍에, 고난’의 의미입니다. 이것을 잘 구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나쁜 짓을 하다가 받는 비난, 그것을 고난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큰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귀에 ‘에바다’의 기적이 일어나길

귀는 듣는 일을 합니다. 닫힌 귀는 자신에게 필요한 말만 듣습니다. 아니, 자신에게 유리한 말만 듣습니다. 더 나아가서 듣고 싶은 말만 듣습니다. 그러나 열린 귀는 이웃에게 필요한 말을 듣습니다. 우리 사람들의 귀는 선천적으로 나쁜 말을 잘 듣습니다. 남을 칭찬하는 말은 그냥 스쳐 지나가도, 남을 비난하는 말에는 귀가 솔깃해지는 것입니다. 남의 약점보다는 장점을 잘 듣는 귀, 나쁜 말보다는 좋은 말을 잘 듣는 귀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복된 사람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는 국민의 말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왜 국민이 그런 소리를 하는지 잘 들어야 나라가 편안해집니다. 그런데 아무리 국민이 이야기해도 듣지 않으면, 그는 지혜로운 지도자라 할 수 없습니다.

멀리 가지 않겠습니다.
귀를 여십시오. 자연의 소리에, 이웃의 소리에, 하나님의 소리에 민감한 귀를 가지십시오.

우리 입에 ‘에바다’의 기적이 일어나길

입은 말하는 일을 합니다. 그리고 입을 열어 음식을 섭취함으로써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읽은 성경 말씀에는 혀가 굳어져 어눌하게 말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예수님을 만나 말이 분명해졌습니다. 예수님을 만나 어눌하게 말하던 사람이 분명한 말을 하게 되었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담고 있겠습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예와 아니오!’를 분명하게 말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이분법적인 삶의 태도로 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기 삶의 노선을 분명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살리는 말이 있고 죽이는 말이 있습니다.
자살하려던 사람들에게 설문조사를 했더니 자살 충동을 느낀 가장 큰 계기는 누군가의 말이 ‘상처’가 된 경우가 가장 많았다고 합니다. 말을 하는 대로 살아지는 것이 삶이라고 합니다. 좋은 말, 긍정적인 말을 많이 하십시오. 아주 많은 훈련이 필요합니다.

우리 눈에 ‘에바다’의 기적이 일어나길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무엇을 어떤 관점에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상당히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어떤 편견을 가지고 보면 우리는 사물을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열린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단점을 잘 보되 타인의 장점을 잘 보는 사람입니다. 닫힌 눈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장점만 보고, 타인의 단점만 잘 보는 사람입니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도 믿지 못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어이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눈뜬장님이었습니다. 먼 훗날, 아니 2천 년 후에 우리가 하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만일 우리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한국교회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보면 여전히 살아계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고도 믿지 못하고, 이단아라고 손가락질을 할 것만 같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칠 것 같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오늘 대형교회 중심으로 이뤄지는 일들이나 교계 지도자라고 자처하시는 분들이 하는 일들의 면면을 보니 그렇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어디에 계실까요?
우리의 모든 삶에 ‘에바다’의 기적이 일어나길 소망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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