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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ogic] 예수님과 딜레마(요 8, 9장)

신솔문 (전북동노회,임실전원교회,목사) 2010-06-17 (목) 08:20 13년전 4926  

논리학(Logic)의 주제는 논증(argument)입니다.

'논증'이라는우리 말이 주는 어감을 피하려고, 'Logic'이라는 표제어를 달았습니다.

목회자칼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논증>과 <신학/설교>의 연관성을 생각해보시면 저절로 해명되리라 생각합니다.

앞으로 틈틈이 신학/목회와 관련된, 이 주제에 대한 단상을 올려보겠습니다.

서술 계획과 체계를 가지고 소개하지 않고 '붓 가는대로' 적어보겠으니

목회칼럼 사이의 '막간' 정도로 여기시고 즐기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A.


“만일 그가 알았다면 같이 책임져야하고, 만일 몰랐다면 직무유기로 책임져야한다”


정적(政敵)을 퇴진시키기 위해 흔히 써먹는 딜레마입니다. 양쪽에서 칼을 들이대고(그래서 양도兩刀논법이라고 함) 상대방을 궁지로 몰기 때문에 삼박한 느낌을 주고 그래서 그런지 지금까지 고안된 논증 형식들 중 심리적 설득력이 가장 큰 논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성경에서도 이 논법의 역할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겠지요.


이해를 쉽게 하기 위해 위의 논증을 분명히 드러내면 이렇습니다.


1. 그가 알았든지 몰랐든지 했을 것이다.

2. 만일 그가 알았다면, 같이 책임져야 한다.

3. 만일 그가 몰랐다면, 직무유기로 책임져야 한다.

4.(그러므로 어쨌든) 그는 책임져야 한다.

    

1∼3은 결론 4를 받아들이게 하는 설득 역할을 하는 근거(전제)들입니다. 1번 전제는 별 이의가 없는 사소한 주장이므로 그리고 결론 4는 드러내지 않아도 누구나 짐작해내는 내용이므로 굳이 언급하지 않고 2와 3만 말하고 있는 것이지요.


딜레마에 대처하는 방법은 다시 말해서 “당신의 결론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려면 전제들을 무력화시키면 됩니다(전제와 결론의 논리적 관계를 문제삼는 방법도 있습니다만 딜레마에는 해당되지 않습니다). 이 경우 1과 2는 무력화하기 쉽지 않습니다. 결국 3을 문제 삼을 수밖에 없지요. 더 세부적인 뒷받침이 필요하지만 3에 대한 반박 핵심은 이것입니다


“몰랐다고 다 직무유기는 아니다”.




B.

요한복음 8:1∼11을 보면 율법학자와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논법을 응용해서 예수님을 공격합니다.


1. 예수가 돌을 던지라고 하거나 그러지 말라고 할 것이다.

2. 만일 돌을 던지라고 하면, 율법은 지키지만 냉혹한 자로 취급당한다.

3. 만일 그러지 말라고 하면, 율법을 안 지키는 불법자 취급당한다.

4.(그러므로) 냉혹한 자로 취급당하든지 불법자 취급당할 것이다.


함정을 이렇게 준비해놓고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이 경우 앞의 딜레마와 달리 2와 3이 무력화하기 쉽지 않습니다. 결국 1을 문제 삼아야 하는데, 아닌게 아니라  예수님은 1번을 비켜 가는 뜻밖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조건부 ‘돌을 던져라’>이라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1에 걸려들지 않는 것이고 따라서 이 딜레마논법은 효력을 상실해버리고 맙니다.


요한복음 9:1∼3에서도 비슷한 일이 생깁니다.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면서 제자들이 “이러한 시각장애가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공격하는 질문은 아닙니다만, 더 분석하면 유대인들과 제자들이 빠져있는 딜레마(어쨌든 죄의 대가라는 고정관념)의 출발점이 되는 질문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 선택지를 걷어치우는 답변을 하십니다. 둘 다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위한 고통이라는 것이지요.



C.


사람들은 이런 딜레마를 타인뿐만 아니라 자신에게 던지며 살아갑니다. 특히 삶의 기로에 서서 1번과 같은 선택지를 찾아내고 각각의 경우 이르게 될 결과를 따져 봅니다. 문제는 많은 경우에 이런 추론의 결과가 비관적이라는데 있습니다.


비관적으로 가는 첫째 원인은 1번과 관련된 것으로서 다채(多彩)로운 현실을 흑백(黑白)으로 본다는데 있습니다. ‘이것’ 아니면 ‘저것’ 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그것’운  못 보는 것이지요. 요한복음 8·9장에서 예수님께서는 흑백 논법에 갇힌 사람들에게 제3의 길을 제시함으로서 건설적인 미래를 열어주십니다.


비관적으로 가는 둘째 원인은 2번이나 3번과 관련된 것으로서 결과들을 비관적으로 해석한다는데 있습니다. 행복감과 불행감은 대부분, 사실 자체에 들어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에 대한 해석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의 힘을 사실 자체에 대한 개선에서만 찾는데, 사실을 해석하는 기독교적 가치관 영역에서 신앙의 힘은 더욱 더 두드러집니다. “몰랐다고 다 직무유기는 아니다”처럼 “그랬다고 불행한 것이 아니다”는 해석 모델을 성경은 수없이 제시해주고 있습니다. 결과적인 성공에 집착하여 이 해석의 힘을 활용하지 못하는 신자야말로 “불행”한 신자아닐까요?


줄기세포에 대한 서울대조사위 보고서도 문제 삼으면 문제점이 드러날 정도로 완벽한 추론(inference)은 현실세계에서 극히 드뭅니다. 우리들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격정 속에 진행된 사유는 문제점 투성입니다.


묵상과 기도 시간 끝에 겸손하게 주님 앞에 우리의 생각을 드러내놓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cf. 2006년도 2월 경 수요예배 설교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이런 설교는 극히 드물 것 같습니다. 특히 우리나라 기독교에서요. 이런 설교에 은혜받은 우리 교회같은 교회도 드물고요.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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