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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야훼, 전능의 하나님이다 (출 5:1-7:7)

김이곤 (대구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23 (화) 19:11 14년전 8687  

설교자를 위한 구약읽기 - 역사서(26)

출애굽역사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속의지(救贖意志)

(출 1:1-15:21)

김이곤(한신대 명예교수/실천신학대학원 석좌교수)

__________

나는 야훼, 전능의 하나님이다

(출 5:1-7:7)

도입(導入)

우리의 본문은 다분히 신학적이다. 왜냐하면 우리 본문(출 5:1-7:7)은 “야훼가 누구냐?”(“미 야훼”; 출 5:2)라는 물음으로부터 시작하여 “나는 야훼다”(출 6:2,6,7,8,29; 7:5)라는 대답으로 종결짓는 단락(段落)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물음은 구약성서의 중심적인 신학적 물음이다. 우리는 이미 창 32:29[28]; 출 3:13; 삿 13:17을 통하여 “야훼의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이름이 곧 그의 실재이다. Nomen sunt realia!)를 물음으로서 이 신학적 주제를 그 이름 (“쉠”)의 본질에 따라 진지하게 다룬 바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제기하는 물음(출 5:2)은 매우 다른 시각에서 제기되고 있는데, 그것은 신의 “이름”을 묻는 신학적 리비도(libido theologica)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 물음이 아니라 모세와 아론이 히브리인 노예들의 해방을 요구하는 신()이 “야훼”라고 하였을 때 노예들을 부리고 있는 제국(帝國)의 왕 바로(Pharaoh)가 던진 질문, “미 야훼”(=“야훼가 누구나?”)라는 질문에서부터 출발하고 있는 물음이다.

이에 대하여 모세와 아론이 <그는 “히브리인의 하나님(“엘로헤 하이브리임”)이시다.”>라고 대답하자, 바로 왕은 그 말뜻을 곧 알아듣고(?곧 알아들었다는 듯이?) “너희들이 이 백성으로 하여금 일을 못하도록(게으르게) 하려느냐? 가서 노역이나 [열심히]하여라.”(출 5:4)로 응답하였다. 이로 인하여 바로 왕의 마음은 반(反)야훼로 굳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하여 강제노역의 고통은 오히려 더욱 심화되어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들도 모세와 아론의 지휘권에 도전하게 되었으며 그리하여 모세는 야훼를 향하여 “라마?”(“어찌하여?” why?)를 외치며 이집트로 보냄 받은 것을 탄식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야훼께서는 나는 야훼다라는 말씀을 무려 여섯 번(출 6:2,6,7,8,29; 7:5)이나 말씀하시면서 바로 왕에게 전할 말씀을 다시(再)명하심으로 이집트 땅에서 <모세의 재(再) 소명(召命)>이 새롭게 이루어진 것이다.

여기서 부상(浮上)되는 신학적 쟁점은 <야훼(이스라엘의 하나님)=히브리인의 하나님(엘로헤 하이브리임)>과 <야훼=전능의 신(엘 샫다이)> 즉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히브리인의 하나님=전능의 신>의 의미와 그것이 모세 재(再) 소명 사건에서 갖는 의의가 무엇이냐 하는 것이다.

본문주해(本文註解)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로부터 바로에게 전할 말씀(신탁[神託])을 전해 받은 모세와 아론은 그 말씀(신탁[神託])을 바로에게 전한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의 말씀에, ‘나의 백성이 광야에서 내 앞에 절기를 지키도록 내보내라!’ 하셨다.” 이것은, 분명, 종교적 관심을 나타내었다. 이른 바, 정치적 관심의 영역이 아닌, 종교의 자유와 독립성을 요구한 것이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훼”(“야훼 엘로헤 이스라엘”)라는 말은 오경에서는 여기와 출 32:27에서만 나타나는 표현이다. 즉 비(非) 이스라엘인들과의 대화에서는 잘 사용되지 않는 용어를 여기 바로 왕에게 처음 사용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광야에서 절기를 지키는 것”은 종교적 순례의 절정을 표시한다.(출 32장에서는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종교축제를 연 것으로 되어 있다) 모세와 아론의 이러한 제안은 출 3:18에서 이미 예고된 것이었다.(장로들을 동반하지 않은 것이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아니다. cf. Cassuto) 그러나 바로의 반응은 의외로 그러한 신탁(神託)을 내린 그 신 “야훼”는 도대체 누구냐? 라는 반문으로 나타났다. 이 질문은 “이름”에 관한 질문이거나 이름의 의미를 묻는 신학적 질문(cf. 창 32:29[28]; 출 3:13; 삿 13:17의 것과는 다르다.)은 아니다. 즉 이 질문은 이스라엘의 신앙적/종교적 자유를 요구하는 그 신은 도대체 “어떤 신(神)”이냐는 것이다. 이러한 질문의 가능성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수 있으나, 아마도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고대 중동의 셈족들이 사용한 많은 신의 이름들(Dingir 표시) 앞에 그 신의 속성(屬性)을 설명하기 위하여 붙인 <형용사구들(divine epithets)>, 예컨대, “야흐위”(who causes to be)라는 형용사구들(yahwi-Dingir)이 “마리 문서”(the Mari texts, 기원전 18세기경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유프라테스 강 중류지역에서 발굴된 문서, F. M. Cross, Canaanite Myth and Hebrew Epic, Harvard Univ. Press, 1976, P. 62))에서 발견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모세가 말하는 “야훼”(“야흐위”와 유사함)라는 말이 “어떤 신(神)을 설명하는 말인지”를 알고 싶어 하였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바로 왕의 말, “야훼가 누구냐? 나는 야훼를 모른다.”라는 말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나 생각된다.

이에 대한 모세와 아론의 대답은 다음과 같았다. 즉 “히브리인의 하나님(엘로헤 하이브리임)이 나타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광야로 나가서 신앙의 자유를 행사하기]를 원한다.”(출 5:3)라는 대답이었다. 이 대답은, 아마도, 바로가 던진 질문의 핵심을 명료하게 밝히는 대답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은 이 대답에 대한 서슴없는 바로의 즉각적 반응(출 5:4-9)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의 즉각적 반응은, 예상대로(출 4:21) “사태를 더 악화시키는 반응”이었다. 그 반응의 요지는, 해석하건대, <야훼의 요구란 [신앙의 자유/종교의 자유가 아니라] 이 백성의 노역을 쉬게 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며 이 요구는 따라서 단순한 종교적 행사를 요청한 것이 아니라 애급 문화건설의 중추인 히브리인 노예의 해방(이른 바, 민중해방), 노예들의 노역중단을 요구하는 사회 혁명의 요구다.>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바로 왕을 강하게(정곡을 찌르며) 자극한 것이다. 바로의 반응을 표현하는 끝말이쉐켈”(거짓말)이라는 말로 되어 있는 것은 그것을 잘 말해준다.

그렇다면, 바로의 이러한 판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고대 중동종교 문헌 속에 나타난 신(神)의 이름들 중에서 “야훼”라는 신명(神名)과 그 신명의 아이덴티티를 찾아내었기 때문일까? 그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반대! 것이다. 왜냐하면 바로 자신도 “나는 야훼(여호와)를 알지 못하니(‘로 야다으타 엩-야훼!’) …”(출 5:2)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기도 하지만, 고대 아모리인들의 신명(神名) 명단자료(고고학이 발굴한 종교문서들)들에서도 “야훼”는 신의 이름(Dingir)을 수식하는 형용구(epithet)로만 나타난다는 사실(cf. F. M. Cross, Canaanite Myth)이 더욱 더 그러한 판단을 하게 하기 때문이다. 단지 “히브리인의 하나님”(“엘로헤 하이브리임출 5:3)이라는 말이 바로 왕의 재빠른(판단이 너무 빠른!) 판단 -이른 바, 민중봉기에 해당하는 사회혁명적인 개념으로의 판단- 을 하게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애급문화 건설의 막중한 비전을 갖고 있는 바로 왕(아마, 라암셋 성읍 건설을 하였을 라암셋 2세)으로서는 전광석화처럼 그의 뇌리를 치는 반역(叛逆)의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히브리인”이라는 언어가 여기서는, 즉 비록 모세는 종족 개념(gentilic concept)으로 사용하였으나 바로 왕에게서는 사회학적 개념(sociological concept)으로 들리고 또 이해되었을 것이다. “히브리인”이라는 용어는 먼 후대에서는 이스라엘 정통 혈통을 나타내는 자부심이 들어 있는 개념으로 발전되었지만 모세 당시의 고대 중동세계에서는, 전혀 이와는 다르게, 사막 대상(隊商)들의 낙타나 당나귀의 발이나 말구종(驅從)들의 발에 묻어 있는 사막먼지(‘aphar, 먼지; “히브리인”이라는 말은 아마 “앗팔”[먼지]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을 것이다!) 정도로만 취급받았든 천민계층, 즉 사회의 정규 시민에 들지 못한 사회변두리의 떠돌이, 이른 바, 아카드, 이집트, 우가릿 문헌들에 나오는 그 “아피루”(Apiru/Haviru)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므로(“아피루”와 “히브리”의 일치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으나 그들이 사회변두리의 “국외자들”이라는 점에서는 대체로 인식을 같이한다.), 그러므로 제국주의 문화를 만들고 있는 이집트 왕 바로에게 있어서는 “히브리인의 신의 요구”란 일종의 “민중반란”(노예반란)의 개념으로 인식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비록 이 말이, 형식상으로는, 모세를 앞세운 이스라엘인들의 “종교적 요구”로서 나타났다고는 하여도 바로 왕에게는 “사회 반란을 불러일으키는 반역(叛逆)”의 언어로 들리게 되고 이 요구가 이스라엘 노예들에게는 자신들의 상황을 본래의 사태보다 더 나쁘게 만드는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출 5:4-21에 나타난 바, 이스라엘인들에게 부과된 강제노역이 더욱 심화(深化)되고, 또 이에 따른 이스라엘 백성과 지도자 모세 사이의 내적 충돌(자중지란[自中之亂]같은)을 야기(惹起)하는 데까지 갔다는 보도는 바로 이러한 사실을 증언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여기서 모세의 제2의 소명사건(출 5:22-7:7)이 일어난다. 이른 바, 호렙 산에서의 소명(출 3:1-4:17)과는 구별된 이집트 땅에서의 소명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악몽(惡夢)을 꾸듯, 모세는 야훼를 향하여 “어찌하여?”(“라마?”)라는 “항변의 탄식”을 부르짖는다. 현실부조리로 인하여 하나님을 고발하는 형식의 “탄식항변”(Anklage Gottes)을 나타내는 대표적 히브리어 어투인 <“라마”(“어찌하여?” why?)의 반복>에 의한 높은 강조가 눈에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아마도 출 4:21b에서 야훼 하나님께서 예고하신대로, 즉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강하게 만들겠다.”라고 말씀하신바대로, 야훼 하나님은 바로 왕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셨고 이러한 야훼 하나님, 즉 바로 왕의 마음을 지배하고 조종하시는 야훼 하나님을 참아내기 어렵다는 인간적인 절규가 모세의 입을 통하여 쏟아져 나온 것이다. 시편 탄원시들 속에서 자주 나타나는 바, 이러한 종류의 “부조리한” 현실(하나님이 “악”을 사용하셔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녀를 징계로서 교육하시는 이 부조리해 보이는 현실)에 대한 항변의 탄식표현은 비록 “불평”(complaint)으로 보이기는 하여도 그것은 오히려 불신앙의 표현이라기보다는 신앙적 표현의 또 다른 한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일종의 기도이기도 하며 하나님에게 접근하는 한 방법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당신은 어찌하여! 당신의 백성을 학대당하게 하시나이까?” “당신은 어찌하여! 나를 보내셨습니까?”(출 5:22)라고 신학적 성격의 항변을 하게 된 것이다. 그 다음에 계속해서 같은 의미의 항변이 반복어법에 의하여 강조되는 것은 이와 동일한 문맥에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제가 주의 이름으로 말한 그 때부터("메아쯔" Ever since I first came …) 그것이 그가 이 백성에게 학대를 더하게 하신 것이 되었으니 주께서 구하여 주소서. 주께서 주의 백성을 구하지 않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출 5:23)라고 모세가 하나님께 매달리게 되었던 것이다.

출 6:1에 나타난 야훼 하나님의 반응은 그리하여, “이제(attah)! 너는 내가 바로에게 행하는 것을 보기만 하라! [나의]강한 손 때문에(beyadh hazaqah) 그가 그들을 내어보내리라. [나의]강한 손 때문에(beyadh hazaqah)! 그가 자기 땅에서부터 그들을 내어몰아내다시피 할 것이다.”(출 6:1)라는 대답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여기 히브리 언어의 수사적 언어놀이가 나타난다. 즉 바로의 마음을 “강하게 하신”(hazaq) 바로 그 “강한 손으로”(hazaq)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출하실 것이라고 표현한다. 모든 것은 야훼 하나님에 의하여 움직여지고 있는 것이다. “믿음”은 이를 수용하는 것이다.

이 일 다음에 연결되는 것이 바로 매우 특이한 구성의 “야훼의 자기계시(自己啓示)를 통한 모세 재(再) 소명사건”(출 6:2b-7:6)이었다. 이 소명사건의 문학적 구성은 ①요소요소에 <나는 야훼다>(’ani YHWH)라는 자기선언문을 연결고리 또는 연결 축(軸)으로 한 자기계시(自己啓示)를 배열(출 6:2,7,8,29; 7:5)하는 문학구조를 띤다는 것이고, ②야훼의 자기소개를 제시하되, 출 3:14의 경우(“나는 있다”[에흐예] 또는 “나는 있게 한다.”[아흐예])와는 다르게, “나는 엘 샤따이다.”(’el shadday, 출 6:3)라고 자기를 설명(epithet)한다는 것이며, ③계시의 내용은 자기 백성을 건져내시되,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야훼이시라는 것을 너희로 하여금 알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나는 야훼다”(“아니 야훼”)라는 이 자기선언은, 침멀리의 연구가 밝힌 대로, 야훼의 중대한 결단행위가 선포될 때마다 그 서두에 앞질러 또는 그 끝에서 마무리할 때 선포되는 도식적 문형이다(W. Zimmerli, I am Yahweh, Atlanta : John Knox Press, 1982, 독어판은 1953). 여기서는 그 선포의 중심내용은 야훼의 자기 설명구인 “나는 전능의 신(엘 샤따이)이다”는 것이고 그의 전능의 행위는 “자기 백성의 구원/속량”이라는 것이다.

여기서의 중심주제는 ①야훼는 “엘 샤따이” 이시다(야훼=엘 샤따이)는 것이고 ②바로, 이 “엘 샤따이”로서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상태로부터 건져내시는 해방/구원 속성의 신이시다는 것이며 ③따라서 야훼 하나님의 이러한 해방/구원 행위의 목적은 이스라엘 구원의 하나님이 바로 “야훼,” 이분이시라는 것을 너희(이 “너희”는 여기서는 “이스라엘”이지만 나중에 애급 재앙사건 때에서는 “이집트인”으로 확장 전이된다.)로 하여금 알도록 한다는 데 있다는 것, 그것을 말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야훼는 엘 샤따이”이시라는 이 선언은, 그러나, 여기서는 이중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 하나는① 야훼와 조상(아브라함, 이삭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 “엘”은 동일하신 신()이시라는 것이고 그 다른 하나는② 그 “엘”(“하느님”)을 수식 설명하는 형용구(epithet)란 이제부터는, 즉 출애굽 해방사건과 더불어서 부터는 이전에 알려져 왔던 그 “[엘] 엘룐”(“지극히 높으신 [神]”)이나 “[엘] 올람”(“영원하신 [神]”), “[엘] 로이”(“감찰하시는 [神]”), 등등과 같은 “형용구”(epithet)가 아니고! 단지 여기서(출애굽 구원과 더불어서) 부터는! “샤따이” 즉 “[엘] 샤따이”라고 부르게 된다는 것이 모세의 제2소명 사건을 통하여 계시된 계시의 초점이라는 것이다.

“샤따이”라는 말은 희랍어 역에서 “판토크라톨”(παντοκράτωρ)이라고 번역되었는데, 이 말은 일반적으로 “전능(全能)하신”(“the Almighty” “All Powerful” “Omnipotent”)이라고 번역되었다. 이 의미는, 여기 이곳의 문맥에서는, 분명, “출애굽 해방의 사건을 이루어낼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 “전능”(全能)이라는 의미는, 오늘의 현대에서는 매우 추상적인 의미로 전달된다. 그리하여 셈 언어학 학자들의 견해들을 종합해 보면, 이 말은 “산()” 또는 “들판”()을 의미하였다. 이에 따라, 어떤 이는 야훼를 “산신”(山神; the Mountain One)을 의미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샤따이”라는 이 신() 형용구(epithet)는, 더 근원을 따라가 보면, 대체로 어원상 “젖가슴들”(쌍수/두 젖가슴)이라는 뜻(매우 고대의 것으로는, 창 49:25; 민 24:4,16)이었다. 이러한 의미(“젖가슴”)의 형용어투를 야훼 신과 결부시켜서 “생산”(生産) 축복을 관장하는 기능의 의미를 부여하여 오경을 통해 자주 사용하고 신학화한 성서기자는 사제문서기자(司祭, P)이다. 즉 이 성서기자(P)가 이 말을 사용한 문맥을 보면(창 17:1; 28:3; 35:11; 43:14; 48:3; 출 6:3) 이 “샤따이”는 고대자료(창 49:25; 민 24:4,6)에 나타났었던 그 의미(“젖가슴을 통한 생산축복”의 의미)와 동일하게! “풍요(豊饒)의 생산(生産)”을 관장하는 기능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즉 그것은 “젖가슴”의 생산/보존기능을 의미하였다.

놀라운 점은, 저 오경 사제기자(P)가 이 “젖가슴”의 은유(隱喩)로부터 전능(全能)의 힘과 전능의 기능을 유추하고 그 은유를 “야훼 하나님”의 전능의 속성(屬性)과 결부 일치시키는 일을 하였다는 점이다. 즉 진정한 구원능력은, 특히, 이러한 절박한 노예상황에 처하여 있는 히브리노예들의 상황에서는, 새 생명창조의 능력이 바로 다름 아닌 구원과 해방 능력의 요체(要諦)요 그것이 곧 전능(全能)이라는 인식을 하게하였다고 하겠다. 아마도 창세기 1장의 창조신학과 출애굽기의 출애굽 해방신학 사이의 시대사적 연결이 사제문서 기자(P)에 의하여 여기 출 6:3을 통하여 이러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히브리 신학의 위대함을 입증하고 있는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즉 이스라엘인들은 그들의 신(神)의 이름을 고대 중동의 여러 신들(祭儀神名들)의 명단(名單)에서 찾아 사용하지 않고 단지 신()의 본질을 설명하는, 이른 바, “야ㅎ웨”(yahwi→yahweh : He causes to be=He creates)라는 형용어구(epithets)만을! 채택하였다는 것, 이른 바, 인간종교가 만든 신의 제의 명(祭儀 名)들로부터는 참 신(神)이 없다고 보고 거기서부터는 그들 신()의 실체를 찾지 않았다는 것은, 실로, 우리의 놀라움을 극대화시킨다고 하겠다. 더 더욱, 창조자 야훼 하나님(One who causes to be=One who creates)의 “전능성”(“판토크라톨”)을 감히 그의 생명출산과 양육의 상징인 “젖가슴”(“긍휼”이라는 히브리말[“라훔”]의 어원이 “자궁”이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은 감히 자기들의 신 “야ㅎ웨”를 “긍휼의 신”[“엘 라훔”]이라고 교조 화[敎條 化]하였다! cf. 출 34:6)이라는 “은유”(metaphor)를 통하여 인식(認識)하고 그리고 그 은유(隱喩)를 사제문서 신학자(P)에 의하여 “신”(神; ’el )의 형용구 (epithet; ’el shadday)로 채용, 보존, 전승하여 왔다는 것은, 실로, <야훼주의 대(對) 바알주의>라는 절대불타협의 극한 대립 속에 있는 반()가나안적 이스라엘의 종교상황 속에서는 결단코 기대하기가 쉽지 않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이집트에서 “다시” 일어난 “제2의 모세 소명”(출 6:2-7:7; P자료)자료는, 모세가 이집트에서 바로 왕과 벌인 그 <모세의 협상/ 대결 자료>(출 5:1-6:1; J+E)를 사제문서 신학자(P)가 자신의 새로운 신학(P 자신의 포로후기 신학)에 연계시켰을 것으로 추론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사제신학자는 출애굽 구원신학(J+E)을 자신의 창조신학(P) 속에 끌어들였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스라엘의 역사적 구원은 하나님(P)의 더 넓은 창조행위 속에 흡수된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관계 안에서 애급 재앙 사건 이전의 <모세와 바로의 대결자료>가 가진 구조를 살펴보면, 놀랍게도, 사제 신학자가 여기서 시도한 신학은 “출애굽의 역사적 구원”을 이루어내신 “너희의 하나님 ‘엘로힘’은 전능의 신이시며 그가 곧 야훼(창조의 신: One who causes to be=One who creates)이시다”는 것을 “너희(이스라엘인들)로 하여금 알게 하는 것”(출 6:7)에 그 목적이 있고 또 동시에 “이집트 사람들로 하여금 또한 역시 알게 하는 것”(출 7:5)에 그 목적이 있었음이 드러난다. 그 문학구성의 특징은 “내가 야훼임을 …로 하여금 알게 하리라”라는 내용의 출 6:7과 출 7:5의 “틀”(framework) 가운데(출 6:8,29)와 그 전면(출 6:2,6,7)에 “나는 야훼다”(아니 야훼)라는 “자기 단언”(self-asseveration)들을 적재적소(適材適所)에 배치(출 6:8,29)시켜서 “전능의 신(엘 샤따이)=야훼”라는 사실을 전 세계(이스라엘과 애급 모두)에 알리는 형식을 취한다.

여기서는(P설화의 “모세 소명기사”에서는) 출애굽 해방의 신 야훼란, 실은, 조상 때로부터(창 17:1; 28:3; 35:11; 43:14 etc.) 창조의 신(창 14:19,22)이셨으며 그리고 전 세계를 창조하신 이 창조신이 바로 “야훼”이시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리시려 하신다고 하는 신의(神意) 계시(啓示)가, 즉 “나()는 야훼이다.”는 신의(神意)의 계시가 좌절에 빠진 모세와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켜 세우도록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 본문의 중심 메시지가 되고 있다고 하겠다. 사제문서(P) 기자는 여기에 모세의 레위 계보도 첨가해 넣고 또 이전(J+E)에 있었던 모세 소명기사의 일부분(출 6:10-12, 28-30)도 덧붙여 넣어 전체 단락을 완결 짓고 있다고 하겠다.

도출(導出): 설교 응용

우리 본문은 이집트 땅에서 받은 모세의 제2소명 사건에 대한 기록이다. 제1소명기사(출 3:1-4:17)는 “모세를 부르시고 보내신 분”이 “야훼”이시라는 것을 밝히는 내용이 그 중심이라면, 제2소명 기사(출 6:2-7:7)는 그 분, “야훼”는 조상 때부터, 아니, 태초의 창조 때부터 이 역사를 이끌어 오신 “창조신 엘”(El who causes to be=El who creates)이시며 그리고 출애굽 구원사건의 문맥에서는 이 “야훼”는 “엘 샤따이”(El Shadday)이시고 그러므로 그는 “젖가슴의 창조성”으로 출애굽 해방을 이끌어내실 것이라는 것을 선포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본문을 통하여 도출(導出)해 볼 수 있는 설교 주제를 제안해 본다면, (1)우선, “야훼가 누구냐?”(출 5:1-9; 특히 출 5:2)라는 바로 왕의 질문을 주제로 하여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고대 (중동의) 문명국들이 갖고 있는 제국주의 종교문헌들 속에서는 결코 발견되지 않는 “신”()이 “야훼”다. 마치 사도 바울이 아테네 선교에서 아테네 시민들의 그 풍부한 종교심에도 불구하고 아테네 시민들이 정작 알지 못하였던 신(“알지 못하는 신에게”/“아그노스도 데오”, 행 17:23), 그 분, 그 창조신(행 17:24)이 바로 참 신이시었듯이, 모세는 여기서 당시의 고대 중동의 최강국 이집트가 “알지 못한다.”(로 야다아티)고 단언(출 5:2b)한 그 “야훼”, 그 창조신(엘 야휘)이 다름 아닌 바로 그 참 신이시라는 것을 증언하는 메시지를 선포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그 다음으로는 “히브리인이 우리에게 나타나셨으니”(출 5:1-9, 특히 출 5:3)라는 모세의 응답을 주제로 하여 설교주제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은 비록 고대 중동제국들의 종교문헌에서는 찾아낼 수 없는! 이름이었지만, 지상 세계의 열국 왕들은 재빨리 눈치를 채고 즉각 거부감을 나타내 보였던 신()이시다. 즉 제국주의 종교들이 신봉하는 신은 고통 받는 약자를 변호하고 구원해 주는 신이 아니라 고통 받는 약자들의 강제노역을 통하여 문화건설을 이룩하고 그 혜택을 누리며 사는 자들의 편에 선 신(神)이었기 때문이다. 즉 “참 신(神)”과 현저하게 구별되는 “다른”(출 20:3)신이시다. 오늘 현대 종교들의 부패는 이와 같이 “힘의 논리”로 힘 있는 자의 편에만 서서 힘없는 자들의 희생으로 얻은 부유를 누리면 산다는 데 있다. 이들에게 “참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 “히브리인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전하는 메시지를 여기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세 번째로는 <출애굽 구원의 신전능의 신이시다.>는 증언으로부터 설교주제를 추출해 볼 수 있다. 즉 “전능”(全能)의 구약성서적인 개념, 특히 사제 신학자(P)의 “전능” 개념은 매우 기독론적인 메시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젖가슴”의 전능성은 “희생의 창조성”에서부터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젖가슴”의 희생적 사랑이 가진 능력이 진정한 의미의 “전능”(全能)의 능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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