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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식 교수의 “생명의 영과 몸의 신학

박재순 (서울북노회,,목사) 2010-03-23 (화) 18:47 14년전 6791  
최인식 교수의 “생명의 영과 몸의 신학-류영모의 <다석어록>을 중심으로”를 읽고


온 몸으로 생각하고 믿고 실행했던 한국의 기독교 사상가 류영모의 삶과 정신을 최교수가 신학적으로 연구한 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류영모의 삶과 정신이 철저하고 깨끗할 뿐 아니라 그의 사상이 깊고 넓고 높은데 비해 아직 본격적인 학문적 연구와 논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영성이 깊고 높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사상이 독창적이고 심오하고 넓기 때문에 그의 삶과 사상은 철학적으로나 신학적으로 깊이 탐구하고 논의해야 할 정신과 사상의 큰 산맥이라고 생각한다. 류영모의 사상에 대한 최교수의 연구를 높이 평가하면서 함께 생각하고 토론할 과제들을 제시하려고 한다.
최교수는 신학이 관념의 세계에서 벗어나 몸 수련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생명을 대자적(對自的)으로 대상화하지 않고 즉자적(卽自的)으로 다시 말해 생명의 주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생명을 “나”로서 이해한다. 최교수는 생명을 “나”로 이해함에 있어서 몸의 현실에서 출발함으로써 영과 몸을 통전적으로 파악한다.
최교수의 이런 접근은 다석 류영모의 사상과 일치하며 다석 사상을 이해하는데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다석은 몸과 생명과 얼을 “나”로 파악하고 탐구한 주체성의 철학자였다. “나”는 자유로운 주체이기 때문에 물질적 제약과 속박에 매이지 않는 정신이며 얼이다. 따라서 “나”는 물질을 초월한 “없음”(無)과 “빔”(空)의 절대세계에 속하며, 하나님과 직결되고 일치된 존재이다. 다석이 몸나와 얼나를 대립시킨 것은 몸나가 물질과 감각에 속박된 “거짓나”이기 때문이다. 몸이 물질인 한 몸은 주체인 “나”가 될 수 없고 “부림치”(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 다석은 몸이나 물질 자체를 천시하거나 부정하지 않고 존중하면서도 몸과 물질을 “나”에 종속시킨다. 얼나가 살기 위해서는 몸나는 죽어야 하며, 몸의 감각과 욕심은 극복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다석은 식(食)과 색(色)을 끊고 정신과 얼나의 세계에서 곧게 서려고 한다.
최교수가 말하듯이 다석은 몸이나 물질 자체를 부정하거나 멸시하지 않고 존중했다. “맥박이 뚝딱뚝딱 건강하게 뛰는 소리가 참 찬송이다.”(어록 233) 다석은 도(道)를 밥먹고 숨쉬는 것이라고 했다. “도란...흙으로 빚고 코로 숨쉬는 것이다...배고프면 먹어 흙을 빚고 고단하면 자고 코로 숨을 쉰다....”(바람직한 상. 1,849-52)
다석은 물질이나 몸의 감각에 매이지 않는 자유와 해탈, 자유롭고 옹근 삶, 신과 하나되는 충만한 삶을 추구했기 때문에 몸과 물질에 대한 집착과 매임에서 벗어나려 했다. 그는 몸과 맘의 집착과 욕심에서 벗어나 얼나에 이를 때 비로소 몸과 맘의 자유와 충만에 이른다고 보았다. 그는 자연의 생명원리에 따르는 ‘맘대로 하고’, ‘몸대로 되게’를 ‘하게, 되게’라 하고 이것을 몸과 마음의 자유로운 경지로 본다.(하게 되게. 1,809) 다석은 “脊柱는 律呂 율려(律呂)는 풍류, 음악을 뜻한다. 율은 음의 조율(tuning)을 뜻하고 려는 풍류를 뜻한다. 옛날에는 새 나라를 세우면 법과 제도, 도덕과 풍습을 바로 잡을 뿐 아니라 음악의 기본음을 정하고 기본음에 맞추어 악기들을 조율하고 가락을 정했다. 옛날에는 음을 측정하는 기계장치가 없으므로 기본음을 정하고 이 음에 따라 악기들을 조율하는 일이 중요했다. 강증산은 죽기 전에 “율려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최근에 김지하가 율려를 내세워 새로운 미학과 사상운동을 펼치고 있다.
,  거믄고”(다석일지. 1955, 4.27)라고 했다. 다석은 척주를 율려라고 함으로써 몸을 삶의 기본음(基本音)으로 보고 을 거문고라고 함으로써 맘을 악기로 보았다. 여기서 몸과 마음의 예술적 일치에 이르는 자유로운 경지를 추구한 다석사상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신학함”은 “생명의 춤과 노래가 되어야” 한다는 최교수의 결론은 몸과 영에 대한 다석의 사상과 정신을 잘 드러낸다.

최교수는 영과 몸에 대한 다석의 사상을 있는 그대로 제시하고 비판 없이 따라가고 있다. 다석의 삶과 정신과 사상이 크고 높을 뿐 아니라 아직 제대로 이해되고 해명되지 않은 시점에서 섣불리 다석을 비판하는 것은 주제넘고 경솔한 짓이 되기 쉽다. 그러나 논의를 위해서 이런 다석의 몸 이해가 지닌 문제를 함께 짚어보는 것은 허락되리라 믿는다. 다석의 몸 사상에 관한 나의 이해와 문제제기에 대해서 최교수의 견해를 듣고 싶다.

첫째 다석은 몸을 주로 “정신과 얼의 나”로 봄으로써 몸의 유기체적 전체성과 물질적 신체성의 구체성을 소홀히 한 것이 아닌가 물을 수 있다. 몸은 “나”이면서 유기체적 구조이며 틀(system)이다. 틀로서의 몸에 대한 논의가 요청된다. 몸은 유기체적 생명체로서 생태학적 관계 속에 있으며, 우주만물의 상생적 조화이며 협력의 결실이다. 또한 몸은 사회적 관계와 의존 속에 있다. 인간은 몸을 지닌 존재로서 생산하고 소비하며, 가정을 갖고 아이를 낳고 몸으로 사귀는 존재이다. 다석이 밥을 소중히 여기고 먹 거리와 생필품을 생산하려고 땀 흘려 일하는 농민과 노동자를 “오늘의 예수”로 본 것은 몸과 노동의 사회적 관계를 중요하게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석은 유기체적 구조로서 몸의 느낌과 필요, 감각과 욕구를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봄으로써 영지주의적 편향을 보이는 것 같다.
성서의 몸 이해는 몸은 인격적 주체로 보면서도 영의 집으로 보고 유기체적 공동체로 보며,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고 하면서 몸의 신체성과 물질성을 적극적으로 본다. 예수는 병을 고치는 일에 힘쓰고, 민중의 목마름과 배고픔에 대해 배려하고, 함께 어울려 먹고 마시는 일에 힘썼다. 복음서에 나오는 시험설화에서도 성문제에 대한 시험은 없다. 몸을 존중한 히브리 사고에서는 성(性)과 식(食)에 대한 지나친 금욕이 없다. 나는 식과 색에 대한 다석의 지나친 금욕 사상에서 다석의 소승적 경향을 본다. 그의 성윤리는 너무나 높아서 오늘의 젊은이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이다.
둘째 다석의 사상은 유한하고 상대적인 몸의 약함과 불안을 소홀히 하는 것 같다. 성서의 인물들은 한결 같이 몸과 영혼의 통전과 일치 속에 있고 몸의 약함을 안고 산다. 하나님 앞에서 몸을 지닌 유한한 인간으로서, 육체의 죄성과 죽음을 지고 사는 유한한 죄인으로서 불안하고 흔들리는 존재이다. 아브라함도 야곱도 모세도 엘리야도 불안하고 약하고 흔들리는 존재였다. 베드로도 바울도 더 나아가서 예수조차도 하나님 앞에서 고통과 불안을 온 몸으로 느끼는 흔들리는 존재였다. 몸의 약함과 고통 속에서 흔들리며 하나님께 매달리고 순간순간 결단하고 선택하며 행동하고 모험하는 역사적 인간이었다. 그러나 유영모는 몸의 매임에서 벗어나 흔들림 없는 자유, 이지러짐 없는 완벽한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동양적이며 도학자적이다. 이 점에서 예수, 바울, 함석헌은 몸의 열정과 약함을 지고 사는 흔들리는 인간, 불안과 고통을 온 몸과 혼으로 감당하는 인간으로 살았고 유영모와 구별된다.
셋째 다석은 몸과 물질의 세상의 다양성과 다원성을 넘어 ‘하나’,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귀일을 말한다. 귀일을 말함으로써 인류와 뭇 생명, 뭇 사상과 종교가 하나로 만나고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인식주관과 인식대상도 하나로 통합되고, 인간과 자연과 하나님이 하나로 만나고 통한다. 나와 너와 그의 “나”가 일치하는 생명윤리의 토대가 주어진다. 없음과 빔을 하나와 절대로 봄으로써 절대와 상대의 종합을 추구한다.
그러나 물질과 몸의 잡다한 다수성과 다양성을 넘어 하나님과의 일치를 추구함으로써 전체, 통일을 강조하고 개체와 구체성. 특수와 다양성을 소홀히 하는 게 아닌가? 다석에게는 삼일신고에 나오는 ‘회삼귀일’에서 “셋이 함께 만남”(會三)의 차원이 강조되지 않았다. 집일함삼과 회삼귀일은 하나와 셋, 셋과 하나의 역동적 순환적 일치와 관계가 나타나는데 다석의 관심은 귀일(歸一)에 집중된다. 상대세계의 다원성과 절대세계의 단일성이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역동적으로 결합되는 사고, 경험적이고 현실적인 사고가 더 요청된다고 본다. 그러기 위해서는 서로 다른 다원적인 상대와의 만남에 대한 음미와 평가가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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