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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성영 교수의 “생명공학과 몸의 윤리”를 읽고

박재순 (서울북노회,,목사) 2010-03-23 (화) 18:46 14년전 6549  
오늘날 유전공학 또는 생명공학은 인간과 생명체를 복제하고, 유전자를 조작, 변경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과 인간의 새로운 종을 창조할 수 있는 창조자의 자리에 서게 했다. 인간과 생명세계에 전혀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었을 뿐 아니라 인간과 생명세계를 온통 혼란과 혼돈으로 몰아넣는 묵시록적 재난을 초래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생명공학과 윤리의 문제를 연구하고 논의하는 것은 매우 시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강교수의 “생명공학과 몸의 윤리”는 의미깊은 연구이고 학문적인 기여를 했다고 생각한다.
강교수는 이 글에서 생명공학에 관한 최근의 논의와 연구성과를 섭렵하고 생명공학이 제기하는 문제의 핵심과 논점을 바르게 이해하고 정확한 개념사용과 심도 있는 논리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강교수는 생명공학의 도전과 문제를 깊이 있게 제시하고 문제가 되고 있는 생명공학의 철학적 기초를 “유물론적 환원주의와 유전자 결정론”으로 보았고 인간을 “유전자 기계”로 볼 것인가 “도덕적 존재”로 볼 것인가 하는 근본문제를 다루었다. 그리고 생명공학이 인류에게 제기하는 가장 심각하고 근본적인 문제로서 “새로운 우생학”에 관해서 논의했다. 끝으로 유전자 도그마를 극복하고 몸의 윤리를 제안하면서 몸의 윤리를 위한 논의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특히 몸의 윤리를 “인간 종의 개체적인 몸을 넘어서서 다른 생명체의 몸, 우주적인 몸에 대한 염려와 돌봄”으로 보고 인간존재를 “몸과 정신으로 나누어 질 수 없는 전일적 유기체”이며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영적인 충만함을 지향한다.”고 파악한 것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그리고 과학과 종교의 대화에서 “세 가지 종류의 잘못된 입장들, 즉 서로 무시하고 배척하거나, 절충하여 혼합하거나, 또는 단순히 공존하자는 입장”을 비판하고, “과학과 종교가 각자의 고유한 관점에서 생명권(biosphere)의 안정과 복지를 위해 공명(共鳴)할 때에 진정한 의미가 있다.”고 말한 것에 대해서도 전적으로 공감한다.

나는 강교수가 이 글에서 전개한 논의에 특별히 이의를 제기할 것이 없으며, 대체로 공감하고 동조한다. 그러나 생명공학 또는 유전자 공학에 관한 논의는 인류가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고 생각해보지도 못했던 주제와 영역에로 들어가는 것이므로, 학자들의 논의도 아직 시작 단계에 있으며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있고, 이론과 관점을 형성해가는 도중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더욱이 이 논의는 인류와 생명세계의 본질과 운명을 좌우하는 근본적인 것이므로, 인류의 합의와 이해를 기다려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 논의는 아직 누구도 답을 가지고 있지 않고 함께 “모름의 어둠” 속에서 미지의 세계를 더듬어 가며, 답에 이르는 실마리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다. 따라서 나는 강교수와 함께 그리고 이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학자들과 함께 논의의 실마리를 찾아보려고 한다. 그리고 몇 마디 말을 보태고, 함께 생각할 주제들과 내용을 제시하려 한다.

강교수의 논의는 “유전자 결정론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초점이 있다. 인간의 몸과 생명체를 유전자 기계로 보는 견해나 유물론적 환원주의는 유전자 결정론의 철학적 근거이다. 유전자 결정론을 극복하고 몸을 존중하고 몸에 책임을 지는 윤리를 제시하려면 생명과 우주세계에 대한 유물론적 환원주의와 기계론적 사고를 극복하고 새롭고 심원한 생명관과 우주관이 제시되어야 한다.

오늘날 유전자 결정론은 두 가지로 논박된다. 첫째 유전자 자체가 매우 유동적이고 유연하게 작용하고(fluid genome), 유전자의 행동과정이 대단히 복잡하고 미묘하며 유전자의 환경 또는 맥락에 의존한다는 것이다. 유전자의 주변 환경 또는 세포환경이 유전자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유전자를 변경시킬 수도 있다는 것이다. Linda Van Speybroekck, and Dani De Waele, From Epignesis to Epigenetics: The Genome in Context, Ann. N.Y. Acad. Sci. 981 (2002), pp. vii-viii. 그리고 Mac-Wan Ho, Genetic Engineering Biotechnology Challenges and Opportunities, Address to the Academy of Sciences, Kuala Lumpur, May 28, 1999, p.8. 참조.
둘째 유전자공학 자체가 유전자 결정론을 부정한다. 인간이 유전자를 조작하고 변경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모든 것을 결정하고 지배하는 “유전자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유전자는 물질적 조건과 주변 환경에 의존하고 인간에 의해 조작되고 변경되며 개선될 수 있다는 점에서 소박한 의미의 유전자 결정론은 성립할 수 없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생명공학자들과 인류가 유전자 결정론의 철학적 근거가 되는 유물론적 환원주의와 해부학적 기계론적 실체관에 매여 있다는 것이다. 이런 낡은 세계관과 생명이해를 극복하지 않으면 생명공학의 문제와 도전을 주체적으로 감당할 수 없고 인간과 생명, 몸을 존중하는 윤리에 이를 수 없다.
생명공학의 도전과 문제를 주체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노력이 필요하다.
첫째 기계론적 해부학적 몸이해에서 통전적 몸이해로 나가야 한다. 서구철학과 의학은 데카르트 이래 육체와 정신의 이원론에 근거해서 인간의 몸을 기계론적으로 해부학적으로 이해하는데 익숙해 있다. 오늘날 몸의 유기체적 전체성과 통전성을 강조하는 동양철학과 한의학 그리고 생태학의 관점이 새롭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성서에서 몸(Soma)은 인간 존재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의 자아와 인격을 나타내는 전체이다. 또한 몸은 “하나님의 영이 거하는 집”이라고도 하고 교회 공동체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함으로써 몸의 영성을 강조하기도 했고, 몸의 유기체적 공동체적 성격을 나타내기도 했다.
둘째 정태적인 실체론적 우주관에서 진화적 역동적 전체적 우주관으로 바뀌어야 한다. 고대 서양의 실체론은 고정불변함과 자기완결성을 강조함으로써 기계론적이고 해부학적인 생명관을 가져왔고 인간과 자연, 우주를 정태적으로 이해하게 했다. 생명공학과 유전공학이 밝힌 생명세계는 매우 역동적이고 진화적이며 유기체적인데 유전공학을 사용하는 인간은 낡은 실체론적 정태적 세계관에 사로 잡혀 있다. 인간의 몸과 우주 생명세계 자체가 살아있는 주체이며 변화생성진화해가는 실재임을 파악할 때 생명공학을 윤리적으로 바르게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생명공학이 열어놓는 새로운 지평에 걸맞는 신학이 제시되어야 한다. 이제 인간은 죄인이며 피조물로서 복종하기만 하는 존재로 이해될 수 없다. 단순히 창조세계의 청지기로서 이해될 수도 없다. 이제 인간은 창조자의 동반자이며 동역자로 이해되어야 한다. 인간은 생명공학을 통해서 창조자의 일을 하게 되었다. 인간이 창조자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인간이 창조자의 구실을 하는 것이 비성서적인 것도 아니고 불신앙적인 것도 아니다. 문제는 인간이 창조자의 자격과 품성을 가지고 창조자의 일을 책임적으로 할 수 있는가이다. 창조자의 창조자다운 “자유와 사랑”(창조자의 형상)을 가지고 생명과 우주를 돌볼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유한하고 불완전하며 약한 피조물적 존재이다. 피조물로서 자신의 약함과 무지를 겸허히 인정하고 창조자의 창조세계에 대한 공경과 사랑의 자세를 지녀야 한다. 창조자와 피조물을 구별하면서도 양자의 일치와 만남을 추구하는 통전적 생명이해와 인간관, 우주관, 하나님 이해를 지녀야 한다. 더 나아가서 인간이 생명세계의 일부로서 생명세계를 다룬다는 것을 명심하고 다른 생명체들에 대한 자매애를 가지고 겸허와 정성의 마음으로 접근해야 한다.
생명공학에 의해서 물질과 생명의 비밀이 밝혀졌다고 하지만 물질과 생명의 신비에 대해서 우리가 아는 지식은 매우 제한적이고 부족하다. 인간의 생명공학적 지식은 “모름의 어둠”에 싸여 있다. 물질과 생명의 신비한 깊이, “모름의 세계”를 존중하는 겸허한 자세로 제한적이고 신중한 자세로, 생명과 몸의 자발적 주체성을 존중하는 자세로 생명공학과 유전공학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생명공학의 날선 칼을 함부로 휘두르는 망나니가 아니라 생명과 인간의 몸을 존중하고 보살피는 겸허한 자세로, 기도하는 자세로 생명공학의 기술을 사용해야 할 것이다.
창조자의 뜻에 맞는 행위가 되도록, 생명과 인간의 몸을 참으로 위하는 것이 되도록 조심하며 신중히 접근해야 할 것이다. 생명과 몸의 본질과 필요를 알지 못하면 생명과 몸을 위해 바른 판단과 결정을 내릴 수 없고 바른 행동을 할 수 없다. 우리는 지금 “모르는 세계”를 향해 나가고 있으며 우리가 모르는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는 신앙적 자세를 가져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남(다른 주체)의 생명과 몸”을, 그 운명과 본성을 결정하고 변경하려면 개체와 전체를 아우르는 생명이해가 요구되며, “나”의 주관적 편견과 이해를 넘어서서 “너”(他者)의 자리에서 “너”를 보고 이해하는 주관과 객관을 넘는 초주관적 관점과 윤리가 요청된다. 이런 윤리는 인류와 뭇 생명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버린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그리고 우주를 끌어안고 초월한 하나님 안에서 가능하고 허락될 것이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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