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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예수의 길을 걷고 있는가?

윤응진 (충북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23 (화) 18:07 14년전 8261  
신학대학 및 대학원 신앙수련회 설교
2009.3.11.

우리는 예수의 길을 걷고 있는가?
마태 4:1-11/요한 14:6                  

들어가는 말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요한 14:6)  
예수께서 보여주신 삶의 자취는 인류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만이 참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믿습니다. 우리는 함께 그 길을 걸어가기로 결단하고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과연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걷고 있습니까? 진실로 그 길을 걷기를 소망합니까? 아니, 대체 우리는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이 어느 방향으로 이어져 있는지 알고는 있습니까?
오늘 우리가 경청한 마태복음의 말씀은 예수께서 그의 길을 선택하기 위하여 얼마나 고심하였는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일반인들이 흔히 걸어가는 길과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 길은 좁고 험한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길만이 인류를 구원으로, 참 생명으로 인도할 수 있었습니다. 그 길을 찾기 위하여 예수께서는 세 가지 시험을 통과하여야 했습니다.  

1. 첫 번째 시험
첫 번째 시험의 무대는 유대광야입니다. 예루살렘 동쪽으로 사해바다 주변에 위치하고 있는 유대광야는 매우 척박한 황무지입니다. 예수께서는 그곳에서 사십일을 금식하였다고 합니다.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길에 있는 돌멩이들도 떡으로 보이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배고픔의 경험을 통하여 지상의 굶주리는 사람들의 고통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농사를 지어도 로마인들과 지배자들, 부자들에게 빼앗겨 굶주리고 있는 유대민중이 겪는 고난과 고통의 깊이를 체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예수께 악마가 나타나 시험을 합니다. 악마는 사탄이라고 불리어지기도 하며, 유혹자, 공격자를 의미하는데, 유대인들의 관념에 따르면, 하나님에 대립하는 절대악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사탄은 하나님의 지배아래에 있는 존재로서 인간을 시험하는 역할을 할 뿐입니다. 그러므로 사탄은 인간을 능가한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인간은 사탄의 시험을 극복할 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악마가 질문을 던집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마3:17),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말해 보아라”(3) 유혹하는 자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라는 조건을 제시함으로서 예수님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이 질문은 외부의 유혹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아마도 예수님의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제기되었는지도 모릅니다: “배고픔이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구원이란 배고픈 사람들에게 빵을 마련해주는 일이 아닐까?”
사실 역사상 수많은 “지도자들”이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인간문제 해결의 일차적 과제로 삼았습니다. 그들은 이 과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투쟁하기도 하고 민중들을 현혹시키기도 하였습니다. 한국현대사에서도 독재자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겠다는 명분으로 수많은 노동자들을 착취하였고, 억압적이며 권위적인 사회구조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우리 사회에 교육열이 높은 것도 ‘돌로 떡을 만드는’ 특권을 얻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적인 열광도 ‘돌로 떡을 만드는’ 특혜를 얻기 위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은 음식물이 없이는 생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먹기 위해서만 사는 동물적 삶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음식은 필요하기는 하지만, 인간다운 삶을 위한 수단일 뿐이지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인간은 ‘의미 있는 삶’을 살지 않고는 만족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살기 위해 먹는 것이지, 먹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주 이 사실을 잊고 살아갑니다. 빵만을 추구하는 시대풍조로 인하여 우리는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서로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 빠져들고 있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는, ‘최소한의 도덕성’에 대한 요구도 경제성장을 이루겠다는 공약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얻지 못했습니다. 결국 국민들은 돌로 빵을 만들겠다고 장담하는 사람을 대통령을 세웠습니다. 그 결과가 어떤 것입니까?

굶주린 예수님은 배고픔이 지닌 고통의 무게를 누구보다도 철저히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살아가려면 먹을 것이 필요하다는 데에 충분히 동의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유혹을 물리칩니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다.”(4; 신8:3) 하나님 보시기에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 대답은 결코 배부른 관념론자의 입술놀림이 아닙니다. 이 대답은 배고픔의 고통을 처절하게 맛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죽음의 위험에 직면한 사람의 입을 통해 나온 절규입니다. 이 말씀은 청년 예수의 혁명선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에 동의하고 있습니까? 혹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돌로 빵을 만드는 기적을 기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의 이 선언 앞에서, 오늘의 정치적 선택과 신앙적 결단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 판가름 나야 합니다.

2. 두 번째 시험
두 번째 시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뛰어내려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번에는 악마가 성경말씀을 인용하면서 시험합니다. 성경말씀도 잘못 활용하면 악마의 도구가 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악마는 속삭입니다: 네가 만일 스스로 메시아임을 입증할 기적을 베푼다면, 모두가 너를 메시아로 받들게 될 것이 아닌가? 네가 뛰어내리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능력을 신뢰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네 믿음도 증명하고, 네가 메시아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아닌가?  
이 시험에 대하여, 예수께서도 성경말씀을 인용하여 대답 합니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라!”(신6:16, LXX)
지도자들로 세워진 사람들은 흔히 자신의 탁월함을 증명하여 보이려고 합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권능을 빌어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여 인기를 얻으려 합니다. 세속적인 지도자들만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도 하나님과 성령의 이름을 빌어 자신을 선전합니다. 그러다 지나치면 사이비종파를 창설하고 교주가 됩니다. 예수께서도, 자신이 슈퍼맨처럼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음을 시위한다면, 한순간에 민중의 영웅으로 부각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을 인간의 욕구에 따라 이용하는 행위이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복종시키는 신앙의 행위는 아닌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는 시대의 풍조를 거슬러,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먼저 묻고 그 뜻에 복종하고자 결단한 것입니다.
기적을 베풀어 병든 사람들을 치유할 때마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자신이 메시아임을 발설하지 못하도록 당부하곤 하셨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을 위하여 베푸는 기적을 자신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삼지 않으려 노력하였던 것입니다.
기적으로 인간을 구원할 수는 없습니다. 기적을 보고 따르는 사람들은 또 다른 기적을 요구합니다. 우리는, 출애굽사건에서 수많은 기적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히브리인들이 스스로 노예의식에서 해방되지 못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기적을 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기적이 사라질 때 그리고 기적이 더 이상 요청되지 않을 때 교회를 떠나고 맙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꿰뚫어 보셨던 것입니다. 실제로 그처럼 많은 기적을 행하여 수많은 사람을 치유하고 도왔음에도 불구하고, 예수께서는 결국 십자가에 달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어갈 때, 사람들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십자가에서 내려와 보아라”(마 27:40)라고 조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가족들과 제자들에게는 이 조롱의 말이 간절한 소망의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진실로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기를 간절히 소망했을 것입니다.그 조롱 혹은 소망의 말 속에서 예수께서는 집요하게 유혹하는 사탄의 음성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능력을 자신의 능력을 시위하기 위하여 이용하라는 유혹에 대하여 철저히,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거부하였습니다.
요즘은 ‘자기 PR시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 특히 정치인들이 자신의 능력을 과대포장 하여 선전합니다. 선거철마다 우리는 정치인들의 자기과시욕이 얼마나 심각한지 경험하게 됩니다. 심지어 부흥회 포스터에 등장하는 종교지도자들도 성령을 앞세워 자신들의 능력을 과대포장 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우리 자신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이용하려 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을 이용하여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는 사람은 결코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3. 세 번째 시험
세 번째 시험은 세속적인 권세와 관련된 것입니다. 단 한 번만 악마에게 “엎드려서 절을 하면”, 즉 악마의 뜻에 굴복하기만 하면, 세상의 모든 권력과 영광을 얻으리라는 것입니다. 만일 세속적 권세를 얻을 수 있다면, 예수께서는 고난대신에 영광을 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현실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도록 변혁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구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타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단호하게 유혹을 물리칩니다: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신6:13, LXX)
세상의 권력을 통하여 인간을 구원한다는 것은 환상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경우, 세상의 권력자체가 이미 악마의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 번째 시험과 같은 유형의 유혹도 예수님의 생애에서 거듭되었습니다. 예수께서 자신의 고난과 죽음을 예고할 때, 베드로는 간곡히 만류(마가에 의하면 “항의”)하였습니다. 구태여 고난의 길을 갈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것입니다(마16:22,막8:32). 예수님은 베드로의 만류를 ‘유혹’으로 여기고 단호하게 물리쳤습니다. 이 유혹은 바로 제자들의 지배욕구와 기대들을 통하여 거듭 거듭 반복됩니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영광스러운 권좌에 앉게 되기를 꿈꾸면서, 자신들도 함께 권력의 영광을 나눌 환상에 젖어 있었습니다(마20:20-28, 막 10:35-45). 겟세마네에서(마26-36-46, 막14:32-42, 눅22:39-46), 빌라도 법정에서(마27:11-14, 막15:2-5, 눅23:6-9), 예수께서는 거듭되는 대타협의 유혹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결코 권력을 장악한 자들과 타협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의 삶은 십자가를 자초한 것 입니다. 만일 예수께서 이 죽음의 세력과 타협했더라면, 고난도, 십자가도 없었을 것이며 동시에 부활도, 교회도, 우리의 신앙수련회도 없었을 것입니다. 권력욕에 눈이 어두워 사악한 세력에 굴복하는 사람은 결코 주님의 길을 걸어갈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기독교는 거듭 거듭 정치적 권력자들과 결탁하여 손쉽게 선교활동을 하려 했고, 결국 세력을 확장해 나갔습니다. 그 결과, 기독교가 국교가 되기도 하고, 민족종교로 되기도 했지만, 세상을 변혁할 ‘하나님의 나라 혁명’에 대한 비전을 포기함으로써, 기독교는 존재이유를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이 지녔던 신앙과 비전이 없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맛을 잃은 소금’처럼 세상사람들의 발길에 짓밟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의 위기도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가 ‘장로 대통령’을 비호하는 보수적인 정치세력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4. 우리는 예수의 길을 걷고 있는가?
세 가지 시험의 공통적인 특징은, 인간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험들을 극복하는 방법은 하나님 중심의 신앙에 굳게 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려는 굳은 의지로, 예수께서는 세 가지 시험을 극복하였습니다. 그 시험들을 극복함으로써, 예수께서는 메시아의 길을 걸어갔습니다. 그것은 고난 없이는 걸어갈 수 없는 길이었습니다. 그 길은 대부분의 신앙인들이 걷는 길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은 상식적으로 이해될 수 없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활을 통하여, 바로 그 십자가의 길만이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임이 드러났습니다. 그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의 삶 자체가, 우리를 참된 삶으로 인도하는 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자취만이 참된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임을 고백합니다. 우리는 그 길을 함께 걸어가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주님께서 걸어가신 그 길 위에 서 있습니까?
오늘날 십자가는 교회의 상징이 되었으나, 십자가의 길을 걸었던 예수님의 혁명적 삶은 더 이상 기억되지도 모방되지도 않습니다. 교회 안에는, 예수께서 받은 고난의 ‘공로’ 덕분에, 부활의 영광만을 나누려는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차고 넘치는데, 예수께서 극복하신 세 가지 시험을 극복하며 십자가의 길을 걷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을 걷지도 않으면서, 그분이 그리스도임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은 참으로 용납될 수 없는 자기기만입니다. 십가가의 길을 걷지도 않으면서, 십자가를 교회의 상징으로 세우는 것은 종교적 사기행위입니다. 세 가지 시험을 극복하지 못하는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은 사순절을 단지 종교행사로 변질시킬 뿐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도, 스스로가 세상과 다른 삶의 길을 걷는 수고와 고난 없이, 쉽사리 그리스도의 영광에 참여하려는 것은 아닙니까?
사순절에 모인 신앙수련회에서, 여러분 각자의 삶을 돌이켜보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또 어떤 삶을 꿈꾸고 있습니까? 어떤 신앙인이 되기를 원합니까? 어떤 지도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진정으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고백한다면, 우리도 주님처럼 일상생활에서 세 가지 시험들을 극복하면서 주님의 길을 걸어가야 하겠습니다. 이 시험들을 극복한다면, 여러분의 생각과 태도, 그리고 여러분의 삶은 어떻게 변화되어야 합니까? 어떻게 방향전환 하여야 합니까?
여러분 모두가 일상적인 시험들을 극복하고 주님의 길을 걸어감으로써,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고 한국사회가 밝아지기를 기대합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희망입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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