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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윤응진 (충북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23 (화) 18:05 14년전 7680  
2009.2.22.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레위기 19:1-4, 9-12, 18)

1. 들어가는 말:
지난 한 주간 동안 모든 언론 기관은 온통 김수환 추기경의 사망과 관련된 뉴스를 보도하느라 열을 올렸습니다. 정치에 대한 관심은 실종되었고, 한 종교지도자의 덕행과 추모열기를 전하는 뉴스가 톱뉴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김수환 신드롬’이라는 말까지 등장하였습니다. 물론 김 추기경은 존경받을 만한 지도자였습니다. 그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김 추기경을 추모하면서, 우리는 그분이 지녔던 종교적 영성이나 어떤 신비스러운 능력보다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와 군사독재정권에 대한 그의 비판과 저항을 기억합니다. 또한 그분이 종교권력자로서 신도들 위에 군림하기보다는 겸손의 미덕을 실천하였다고 기억합니다.
그런데 어제 뉴스에는 김 추기경을 성인으로 추대하자는 다소 성급한 목소리가 나오면서 가톨릭의 성인 추대 절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고 합니다. 김 추기경은 낮은 자리로 내려오신 주님처럼 살고자 했는데, 이제 그분을 높은 자리에 올려놓고 숭배하겠다는 것입니다. 이쯤 되면 과열된 추모열기에 대해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분의 삶이 우리의 삶과 특별히 구별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분이 추기경이었으므로, 그의 삶에만 어떤 거룩함이 깃들어 있던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는 다만 그의 삶을 우러러보아야만 하는 것일까요?

2. 거룩하라 !
기원전 550년 무렵에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 제국에서 전쟁포로로 살아갔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잃고, 정복자들의 땅에서 2등 인간으로 조롱과 멸시를 받으며 목숨을 이어갔습니다. 어찌 그들에게 삶의 현실이 관심사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그들은 강력한 제국 한복판에서 제국주의자들과는 ‘다른’ 삶을 살고자 몸부림쳤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로부터 도피하려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히려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함으로써 바빌로니아 제국의 신민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실천하려 하였습니다. 일반인들과는 다른 삶, 그들과는 ‘구별되는 삶’(= ‘거룩한 삶’)을 실천함으로써 그들은 감히 하나님을 본받으려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경청한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레위기 19:2) 인간이 어찌 하나님을 닮을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땅 위에서 살고 있는 인간이 어찌 하늘에 계신 하나님처럼 거룩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씀은 인간적인 삶을 포기하라는 요구처럼 들립니다. 모두 천사가 되라는 요구처럼 들립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실천할 수 없는 것을 요청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그러나 그 다음에 이어지는 요구는 너무나 평범한 것입니다: “너희는 저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여라. 너희는 또 내가 명한 여러 안식일을 다 지켜라.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19:3)
이 계명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한 내용입니다. 여기에서 주목할 것은 부모에 대한 공경이 안식일 준수보다 먼저 요청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뒤 이어서 4절에 비로소 우상숭배에 대한 금지령이 제시됩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흔히 지니고 있는 상식이 깨어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거룩한 삶이란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규정되는 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성경말씀은 전혀 다르게 선포되고 있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가장 가까운 인간관계가 하나님과의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표준으로 제시되어 있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종교적인 특수 관계에서 획득되는 특징이 아니라 일반적인 일상생활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삶의 방향을 특징짓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 왜 하필 부모에 대한 공경이 거룩함의 조건으로 요구되고 있는 것일까요? 특히 주목할 것은 성경본문에는 부모를 흔히 우리가 사용하는 어법대로 ‘아버지와 어머니’로 표기하지 않고 ‘어머니와 아버지’로 표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당시 전쟁포로 생활을 하던 히브리인들 사이에서 가족제도가 와해되고 있으며, 부모에 대한, 특히 어머니에 대한 공경심이 사라지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부모는 누구였습니까? 부모세대는 나라를 외세에 빼앗긴 세대입니다. 전쟁포로 생활로 인한 고통과 고난을 자초한 세대입니다. 그러니 자녀들이 그 부모세대를 존경할 수 있었겠습니까? 부모세대는 자녀들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습니다. 부모세대가 남겨준 유산이란 전쟁포로로 살아가야 하는 고통과 고난뿐이었습니다. 그러니 부모 가운데서도 약자인 어머니에 대한 박대가 극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라고 요구하십니다. 자랑스러운 부모가 아니라 지지리도 못난 부모를, 고통과 고난만을 유산으로 남긴 그 부모를 공경하라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지금 자녀들의 보호를 필요로 하는 약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도 약자들에게 노동휴식을 허락하라는 요청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일주일에 하루는 쉬라는 요청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을 노동착취로부터 보호하려는 배려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내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약자들을 돕는 것! - 이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실천해야 하는 이 거룩함을 실천하지 않고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거룩함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세상 한복판에서 이웃과 함께!
이처럼 성경이 요구하는 거룩함은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복판에서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범죄를 저지른 그 못난 부모세대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그들과 다른 삶을 살되 그들의 생존권을 보호하는 것이 거룩한 삶입니다. 바로 여기에 성경말씀이 지니는 독특한 특징과 위대함이 숨어 있습니다.
레위기 19장을 계속 읽으면 이 사실을 더 확실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사에 대한 규정(5-8절) 다음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을 위한 배려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
9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10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이처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가 어디에 또 있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에게 익숙해진 소유개념이 거부되고 있습니다. 수확물은 내가 독점할 소유물이 아니라 이웃과 나누도록 허락된 은총의 산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11-18절에는 동족인 이웃들에 대한 바른 삶의 방향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 도둑질하지 못한다. 사기하지 못한다. 서로 이웃을 속이지 못한다.(11)
-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여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12)
- 너는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네가 품꾼을 쓰면, 그가 받을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밤새 네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13)
-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14)
- 재판할 때에는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15)
- 남을 헐뜯는 말을 퍼뜨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 너는 또 네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 (16)
- 너는 동족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17)

이러한 계명들은 당시에 유대인들의 상황이 얼마나 각박하였는지를 암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을 헐뜯는 말을 퍼뜨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 너는 또 네 이웃의 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16)는 말씀은 이미 남을 헐뜯고 다니는 사람들, 이웃의 생명을 해치면서까지 이익을 취하려는 사람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단순한 도덕적인 교훈이 아니라 현재 그릇된 삶을 살고 있는 사람에게 회개를, 즉 삶의 철저한 방향전환을 촉구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망하고 침략자들에게 의존하여 살아가면서 그들은 각자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이웃이 눈에 들어올 리 없고 동족이 배려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가족공동체도 민족공동체도 신앙공동체도 모두 파괴되고 다만 살아남기 위해 서로 경쟁하는 개인들만 존재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마치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방인과 다를 바 없이 살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바른 삶의 지침을 내려주셨던 것입니다. 이 삶의 지침은 종교생활이 아니라 일상생활 속에서 실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계명들은 가난한 이웃들과 더불어 사람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도록 촉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의 모습은 결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종교적인 경건을 실천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선적으로 이웃과의 관계에서 인정 많은 삶, 이웃을 배려하는 삶을 거룩한 삶으로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성경이 요구하는 거룩한 삶은 일반적인 종교적 경건과 확연히 구별됩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웃사랑의 계명은 바로 레위기 19:18절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입니다: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이 이웃사랑이 계명도 추상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계명 앞에는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라는 당부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가까운 이웃사촌에게만이 아니라 동족 가운데 원수처럼 여기는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베풀라는 것입니다. 이 이웃사랑의 계명이 바로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삶의 실천을 촉구하는 맥락에서 제시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 계명의 실천을 촉구하면서 원수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를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 같이, 너희도 완전하여라."(마태 5:48)
성경의 말씀에 따르면, 바로 이러한 이웃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람만이 거룩한 사람이며, 하나님을 닮아가는 사람인 것입니다.

4. 김수한 추기경 신드롬을 넘어서서
MBC는 “추모 열기는 가히 김수환 신드롬이라고 할 정도가 됐다”고 보도했습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명동성당 앞에는 추모행렬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거의 40만 명이 길게는 4시간씩이나 줄을 지어 기다리면서 추모행렬에 참여했습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그분을 추모하는 것은, 어른다운 어른, 지도자다운 지도자가 드문 시대에 김 추기경이 보여주었던 겸손과 용기와 약자들에 대한 배려는 우리에게 큰 감동으로 와 닿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을 파리 목숨처럼 여기는 세태에서 그분의 생명사랑 실천도 잔잔한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분이 안구를 기증하였다는 소식에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장기기증 서약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추모의 열기가 뜨거운 시간에 제가, 김 추기경이 그분의 생애 말년에 취하였던 보수적인 정치적 입장에 대하여 비판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그분에 대한 추모 열기가 오히려 자칫 겸손하게 약자들을 돌보려 했던 그분의 뜻을 훼손하지 않을까 우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레위기의 말씀에서 살펴보았듯이 “거룩하라”는 요청은 특정한 종교지도자를 향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그리고 거룩함의 기준은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김 추기경은 그분의 자리에서 그 계명을 실천하려 노력하였던 것뿐입니다. 그분에 대한 추모의 열기가 식지 않는 것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분이 지녔던 영성보다는 힘없는 이웃들과의 관계에서 그분이 지녔던 품성에 대한 기억 때문입니다.
만일에 그분의 선행을 기리기 위하여 지나치게 미화하거나 그분을 종교영웅으로 각색하려 한다면, 그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김 추기경을 우리와 다른 특별한 존재로 간주하는 순간, 우리는 김 추기경처럼 살아갈 의무로부터 자유롭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추기경이었고, 특별하였으므로, 그렇게 살아갈 수 있었다”는 논리는 일반 평신도들에게 “거룩하라”고 요청하는 성경의 말씀을 무효화시킬 구실을 제공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추기경의 자리는 일반 서민들의 고통과 슬픔을 느끼기에는 너무나 삶의 현실로부터 멀리 격리되어 있는 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종교적인 경건에 치중한 나머지 이웃사랑을 통한 거룩함에는 도달하기 어려운 자리입니다. 김 추기경도 그의 저서에서 그가 실생활과 너무 격리되어 있어서 서민들의 고통을 느낄 수 없음을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 추기경이 가난하고 약한 이웃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은 존경할만한 일이지만, 그분의 행위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거룩함’의 완성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거룩함의 완성은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이웃들과 부딪치면서 동고동락하는 서민들이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을 닮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역설적으로 성직자보다는 평신도들에게 더 열려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선행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최소한의 기준이지 최대한의 기준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추기경이 실천하였다는 거룩함은 특별한 덕행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하고 정상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행할 수 있고, 또한 마땅히 실천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다만 그분은 추기경이었으므로 독재자들로부터도 보호받을 수 있는 특권을 본의 아니게 누렸습니다. 그리고 약자들을 향한 그분의 사소한 관심도 과도하게 언론의 조명을 받았습니다. 실제 우리 사회에서는 그분보다 더 독재 권력에 저항하다가 더 큰 희생을 치른 분들이 적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더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 헌신한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추기경을 추모한다면 그분들의 희생과 고난도 함께 기억되어야 마땅합니다.
어제(2009년 2월 21일) 오후에도 서울 청계광장에서 열릴 '용산철거민 살인진압 희생자 제5차 범국민추모대회'가 경찰들에 의하여 원천봉쇄 되었습니다. 결국 희생자 유가족들과 시민들은 서울시청 광장에 모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들은 청와대로 행진을 시도하다가 경찰들에게 저지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몸싸움이 벌어졌고 희생자들의 영정이 부숴졌으며 부상자들이 발생하였다고 합니다. 참사가 일어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희생자들만 처벌받고 경찰의 범죄는 묵인되는 기막힌 일이 ‘장로 대통령’이 통치하는 나라에서 발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경건한 자세로 예배를 드리고 신앙을 고백한다고 할지라도 그는 거룩할 수 없습니다. 그는 김 추기경을 존경한다고 말하지만, 그분처럼 힘없는 이웃을 향해 거룩함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거룩한 삶을 실천하려 애썼던 분을 자신의 수준으로 끌어내리는 망언에 불과합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편에 섰던 김 추기경을 추모한다면, 추모열기는 연쇄살인범의 범죄에 대한 분노만이 아니라 용산화재참사에 대한 저항으로 이어져야 마땅할 것입니다. 약자들 편에 섰던 분을 추모하면서 약자들의 생명을 파괴한 자들의 범죄를 묵인한다는 것은 허용될 수 없는 자기기만이기 때문입니다.
독재정권에 대해 비판적이었던 그분을 진정으로 기억하려 한다면, 추모열기는 정부의 독선과 독주에 대하여 비판하고 시정을 요구하는 저항운동으로 이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추모열기는 정권의 범죄를 은폐하려는 또 다른 언론호도의 도구로 전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분이 겸손한 지도자였음을 추모한다면,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겸손의 미덕을 실행할 것을 요청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추모열기는 일시적인 열광으로 끝나고 말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야훼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보다 앞서서 약자들을 위해 일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강자들만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약자들을 위해 살아가라는 이 요청을 받아들일 때에만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제자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강자들 편에 서고, 강자들을 닮아가려는 세상 사람들과 ‘구별’된 삶을 실천할 때에만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거룩함’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추기경만 거룩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거룩해야 합니다. 아니, 우리는 추기경보다 더 거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분보다 더 깊이 삶의 현실 속에서 가난하고 힘없는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거룩함은 우리의 약한 이웃들을 향한 배려를 통해, 그리고 약자들을 학대하는 지배자들에 대한 저항을 통해 실천되어야 합니다.
하루하루의 삶을 통해 우리 스스로가 거룩한 삶을 실천으로써, 우리의 삶이 이웃들에게 희망과 기쁨을 주게 되기를 바랍니다.


레위기 제19장
거룩한 백성이 되어라

1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2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에게 말하여라. 너는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의 하나님인 나 주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해야 한다.
3    너희는 저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공경하여라. 너희는 또 내가 명한 여러 안식일을 다 지켜라.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4    너희는 우상들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쇠를 녹여 너희가 섬길 신상들을 만들어서도 안 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5    너희가 나 주에게 화목제로 희생제물을 가져 올 때에는, 너희가 드리는 그 제사를 나 주가 즐거이 받게 드려라.
6    제물은 너희가 나 주에게 바친 그 날로 다 먹어야 하지만, 그 다음날까지는 두고 먹어도 된다. 그러나 사흘째 되는 날까지 남는 것은 불에 태워 버려야 한다.
7    사흘째 되는 날에 그 남은 제물을 먹으면, 그 행위 자체가 역겨운 일이다. 제물의 효력이 없어지고 말 것이다.
8    날 지난 제물을 먹는 사람은 누구나 벌을 면하지 못한다. 나 주에게 바친 거룩한 것을 그가 더럽혔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은 자기 백성에게서 끊어질 것이다.)
9    밭에서 난 곡식을 거두어들일 때에는, 밭 구석구석까지 다 거두어들여서는 안 된다. 거두어들인 다음에, 떨어진 이삭을 주워서도 안 된다.
10    포도를 딸 때에도 모조리 따서는 안 된다. 포도밭에 떨어진 포도도 주워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들과 나그네 신세인 외국 사람들이 줍게, 그것들을 남겨 두어야 한다. 내가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
11    도둑질하지 못한다. 사기하지 못한다. 서로 이웃을 속이지 못한다.
12    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하여 너희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다.
(13    너는 이웃을 억누르거나 이웃의 것을 빼앗아서는 안 된다. 네가 품꾼을 쓰면, 그가 받을 품값을 다음날 아침까지, 밤새 네가 가지고 있어서는 안 된다.
14    듣지 못하는 사람을 저주해서는 안 된다. 눈이 먼 사람 앞에 걸려 넘어질 것을 놓아서는 안 된다. 너는 하나님 두려운 줄을 알아야 한다. 나는 주다.
15    재판할 때에는 공정하지 못한 재판을 해서는 안 된다. 가난한 사람이라고 하여 두둔하거나, 세력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편들어서는 안 된다. 이웃을 재판할 때에는 오로지 공정하게 하여라.
16    이 사람 저 사람에게 남을 헐뜯는 말을 퍼뜨리고 다녀서는 안 된다. 너는 또 네 이웃의 1)생명을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이익을 보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주다.히, '피'
17    너는 동족을 미워하는 마음을 품어서는 안 된다. 이웃이 잘못을 하면, 너는 반드시 그를 타일러야 한다. 그래야만 너는 그 잘못 때문에 질 책임을 벗을 수 있다.)
18    한 백성끼리 앙심을 품거나 원수 갚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다만 너는 너의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여라. 나는 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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