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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로 오시는 메시아

윤응진 (충북노회,한신대학교,목사) 2010-03-23 (화) 18:04 14년전 5829  
2007.12.23.

아기로 오시는 메시아
누가 2:1-12



1.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들
대선이 끝났습니다. 대선 후보들은 서로가 자신이 대한민국을 구할 지도자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한 사람이 선택되었습니다. 그를 선택한 사람들은 그에게서 일종의 정치적 메시아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 선택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좀 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외신은 이번 대선을 그리 탐탁하게 보고 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특히 영국의 BBC방송은 “17대 한국대선은 대한민국이 1987년 대통령 직접선거를 도입한 이래 가장 지저분한 선거 중 하나였다”고 혹평하였습니다. 선거캠페인 내내 BBK 주가조작 사건을 놓고 후보들 간에 치열한 공방이 진행되면서, 실제로 중요한 정책 등이 전혀 주목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이 방송은 또 “이번 대선의 유일한 구호는 경제 살리기”였으며, “한국 유권자들은 일자리 문제만 해결해 준다면 대통령이 윤리적인 인물인지 아닌지 여부는 중요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꼬집었습니다.
대선이 종료된 지금, 한쪽에서는 새로운 기대를 지니고 환호하고 있고, 다른 쪽에서는 나라의 앞날을 염려하면서 절망하고 탄식합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성탄절을 맞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이미 대통령 당선자가 우리가 기다리던 메시아라면, 우리는 더 이상 성탄절을 기다릴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실제로 많은 교회지도자들이 그를 메시아의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아마 그들이 예배를 인도하는 교회에서는 성탄절 예배가 필요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대선 결과에 크게 실망하거나 좌절감마저 느끼는 사람들이라면, 정치 지도자들에게 환멸을 느낀 나머지 투표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라면, 그들에게야말로 성탄절은 참으로 의미 있는 시간으로 다가올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메시아의 탄생을 기다린 사람들은 바로 그렇게 정치지도자들에게 실망하고 절망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하나님은 그렇게 절망한 사람들과 함께 분노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23장에는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내 목장의 양 떼를 죽이고 흩어 버린 목자들아, 너희는 저주를 받아라. 나 주의 말이다.
2    그러므로 나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내 백성을 돌보는 목자들에게 말한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서 몰아내고, 그 양들을 돌보아 주지 아니하였다. 너희의 그 악한 행실을 내가 이제 벌하겠다. 나 주의 말이다.
3    이제는 내가 친히 내 양 떼 가운데서 남은 양들을 모으겠다. 내가 쫓아냈던 모든 나라에서 모아서, 다시 그들이 살던 목장으로 데려오겠다. 그러면 그들이 번성하여 수가 많아질 것이다.
4    내가 그들을 돌보아 줄 참다운 목자들을 세워 줄 것이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하거나 무서워 떠는 일이 없을 것이며, 하나도 잃어버리는 일이 없을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5    내가 다윗에게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할 그 날이 오고 있다. 나 주의 말이다. 그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이다.
6    그 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부를 것이다.

“내 목장의 양 떼를 죽이고 흩어 버린 목자들아, 너희는 저주를 받아라!”(렘 23:1) - 이 하나님의 저주선언은 매우 구체적인 이유를 담고 있습니다: “너희는 내 양 떼를 흩어서 몰아내고, 그 양들을 돌보아 주지 아니하였다.”(23:2)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이 저지른 ‘악한 행실’을 벌하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에서 ‘목자’들이란 유다 왕국의 ‘왕’들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려는 하나님의 뜻을 저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과 부귀영화만을 추구하였습니다. 그들의 억압과 착취로 인하여 백성들은 고통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래서 민족공동체는 내부로부터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당시에 유다 왕국을 통치하던 왕의 이름은 시드기야 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야훼는 나의 구원이시다’ 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야훼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지는 않으면서, 하나님께서 그와 그의 왕국을 지켜주실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는 결국 예루살렘을 완전히 멸망으로 몰아넣고 말았습니다(왕하 24:17-25:21). 수많은 백성들이 살해당했으며, 남은 사람들은 전쟁포로가 되어 바빌로니아 땅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현실을 내다보시며 분노하십니다. 하나님은 이런 어리석은 왕들, 사악한 왕들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제는 내가 친히 내 양 떼 가운데서 남은 양들을 모으겠다”(3) 고 다짐하십니다. 더 이상 역사를 지배자들의 손에 맡기지 않고, 친히 역사에 개입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후손에서 “의로운 가지”가 하나 돋아나게 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바로 이 말씀이 유대인들이 갈망하는 메시아에 대한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메시아는 “왕이 되어 슬기롭게 통치하면서, 세상에 공평과 정의를 실현할 것”(5)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메시아에 대한 유대 민중들의 기대, 그리고 메시아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은 이처럼 정치지도자들의 거듭되는 폭정과 실정에 대한 절망과 탄식을 역사적 배경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기대된 메시아는 이 땅 위에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이루기 위해 오시는 통치자입니다. 그 메시아에 의해서 기대되는 구원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때가 오면 유다가 구원을 받을 것이며, 이스라엘이 안전한 거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그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부를 것이다.” (표준새번역: ‘우리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주’)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메시아는 개인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민족 공동체의 구원을 위하여, 더 나아가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역사에 개입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메시아가 통치하면 유다 왕국 전체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이며, 이스라엘은 샬롬이 깃든 “안전한 거처”가 될 것입니다. 따라서 메시아의 이름은 하나님의 구원행위를 찬양하는 내용을 담게 될 것입니다. 표준새번역 개정판은 6절 하반부의 내용을 '주님(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이시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표준새번역은 '주님은 우리를 공의로 다스리시는 주이시다'라고 번역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구원이란 정의로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정의실현과 같은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메시아는 정의를 수립하는 왕으로 오실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2. 성탄의 표징: 구유에 누인 아기
오늘 우리가 경청한 누가복음의 말씀은 바로 그 메시아의 탄생에 대하여 보도하고 있습니다. 첫 번 성탄의 역사적 배경에 대하여 누가복음 기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칙령을 내려 온 세계가 호적을 하게 되었다고 전합니다. 한 문장으로 요약한 이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설명이 필요합니다.
아우구스투스(BC 63~ AD 14)의 이름은 ‘옥타비아누스’입니다. 그는 BC 34년에 안토니우스, 레피두스와 함께 제2회 ‘3두 정치’를 시작하였습니다. 세 명이 공동으로 로마 공화국을 지배하였던 것이지요. 레피두스가 실각하고 난 후에, 그는 안토니우스와 대립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BC 31년에 악티움 해전에서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의 연합군을 격파하고, 이듬해에 이집트를 정복함으로써 지중해 연안을 평정하였습니다. 그리고 BC 27년에 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 칭호는 ‘존엄한 자’라는 뜻으로 신적인 권위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는 로마에 공화정의 제도를 존속시키기는 했으나, 실제로는 군주제를 도입하여 제정 로마의 최고권력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원로원에서는 그를 신으로 숭배하여 제사까지 지냈습니다.
이처럼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되었다는 것은 모든 권력이 신적인 권위를 지닌 한 사람에게 집중되는 전체주의 국가체계가 형성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정치인으로서는 성공한 사람입니다. 그는 “벽돌로 이루어진 로마를 계승하여,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로마를 남겼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대리석으로 빛나는 로마를 이루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식민지 백성들이 착취를 받았겠습니까!
예수께서 태어난 시기가 BC 4년이라면, 이미 로마 제국이 팔레스타인을 식민지로 삼은 지 60년이 되었고, 막강한 권력을 장악한 ‘아우구스투스’가 지배한지도 24년에 접어들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팔레스타인에는 로마 황제의 주구노릇을 하던 ‘헤롯대왕’이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유명한 독재자였는데, 그의 포악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권좌를 지키는 데에 방해가 된다면 아내고 자식이고 가리지 않고 살해하였습니다. 마태복음 2장의 기사는 그의 잔혹성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유대 민중들이 동족인 지도자들에게 희망을 둘 수도 없었습니다. 자치기구인 ‘산헤드린’을 지배하는 대제사장들은 유대인이었지만, 역시 친로마적인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었으므로, 백성들을 억압하고 착취하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신들의 억압과 착취를 정당화하였습니다. 그러니 유대 민중들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였겠습니까!
오늘의 말씀이 전하고 있는 상황은 식민지 백성들에 대한 억압과 착취가 더욱 강화되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호적을 하도록 황제가 칙령을 내렸다는 것은 권력체계의 중앙집권화를 위한 정책이 실시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제 아무도 로마제국의 통제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호적을 근거로 인두세가 빠짐없이 거둬질 것이며, 관료주의적인 지배체제가 완벽하게 형성될 것입니다.
그러니 당시에 유대 민중들은 숨조차 편히 쉬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들에게는 새로운 미래에 대한 희망을 지니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 지배자들에게 어떤 기대도 할 수 없는 절망의 상황에서 모진 목숨을 이어 갔습니다.
바로 그들에게 오늘 우리가 경청한 메시아 탄생의 소식이 전해진 것입니다: “너희는 한 갓난아기가 포대기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것을 볼 터인데, 이것이 너희에게 주는 표징이다."
이 선언이 그들에게 얼마나 감격스러운 기쁜 소식이었을지 상상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들이 처한 처절한 절망의 상황을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이제 한 줄기의 새로운 빛이 어둠을 뚫고 빛나기 시작한 것을 감지하였습니다. 어떤 인간 지도자들도 줄 수 없었던 새로운 희망이 그렇게 그들의 가슴에서 싹튼 것입니다. 인간 지도자들의 거짓과 탐욕, 억압과 착취로 인하여 형용할 수 없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친히 세상을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하여 역사 속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의 탄생은 감격에 넘치는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인류를 구원할 메시아의 거룩한 탄생의 표징은 ‘구유에 누인 아기’입니다. ‘구유’에 아기가 누워있다는 것은 첫 성탄의 신비입니다. 하나님은 팡파레를 울리면서 역사의 무대에 나타나시는 것이 아닙니다. 휘황찬란한 조명을 받으면서 등장하시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아무도 관심조차 기울이지 않는 곳에서 천하고 낮은 자리로 조용히 오십니다. 지배자들의 억압과 착취가 더욱 조직적으로 체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역사 한복판에 하나님은 그 체제의 수혜자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희생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오십니다. 태어난 아기가 마구간 말구유에 눕혀 있다는 것은 철저히 비참한 비인간적인 상황을 폭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신이 되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세상 한복판으로 그렇게, 하나님은 비천한 자리로 내려오십니다. 이것이 성탄의 신비이고 또한 우리가 기쁨과 희망을 지닐 이유가 됩니다.
그런데 그분은 ‘아기’로 오셨습니다. 당장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메시아는 아기로 오십니다. 이것이 첫 성탄의 또 다른 신비입니다.
메시아는 막강한 초인적인 능력을 지닌 슈퍼맨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로 오십니다. 메시아는 이미 오셨으나 아직은 아기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 아기는 아직 아무도 도울 수 없습니다. 당장 메시아로 인하여 새로운 세상이 열리기를 기대한 사람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가 자라서 메시아로서 활동하기까지는 아직도 한 세대를 더 기다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오히려 유대 민중들이 메시아를 보살펴야 합니다. 그 아기를 지배자들의 폭력으로부터 지키고 보호하고 성숙하도록 도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아기에게만 의존할 수 없으며, 오히려 아기를 도와서, 아기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열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기로 오시는 메시아는 그들에게 희망만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과제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메시아를 기다린 사람들 스스로가 이제는 아기 예수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기 위하여 노력하여야 합니다.

3. ‘아기 예수’와 함께 열어야 하는 새 세상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지금 우리가 성탄절을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희망이 사라진 시대에 새로운 미래를 열 메시아를 기다리던 유대인들의 기대와 기다림에 참여하고 있음을 의미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메시아는 강력한 지도력을 지닌 존재로 우리 앞에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아기로 태어나고 있습니다.
아기의 탄생에서 우리는 새로운 미래를 꿈꾸고 기다릴 이유를 찾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들 스스로가 아기 예수를 보호하고 도우면서 함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합니다. 아기가 우리를 대신하여 모든 것을 이루어주기만을 기대할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메시아처럼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메시아에 의존해서 우리의 소망을 이루기를 갈망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가 아기 예수가 지닌 꿈을 함께 이루기 위해 메시아의 삶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대선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메시아는 ‘구유에 누인 아기’로 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 아기를 위해, 그 아기와 함께, 새 내일을 열라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 가정에 복을 주셔서 모두가 아기 예수와 함께 복된 길을 걷게 되기를 바랍니다. 모든 이웃들을 향해 메시아처럼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아기 예수와 함께 우리 스스로가 더욱 밝고 새로운 세상을 함께 열어가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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