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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한신대 간첩조작 사건 법정공판 안내

관리자 (기타,총회본부,목사) 2016-11-29 (화) 11:15 7년전 4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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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한국신학대학에서 벌어진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을 아시는지요?
재일동포로 살다가 고국의 한신대로 유학온 김철현씨를 간첩으로 만들고 
김철현씨와 가깝게 지내던 한신대 학생 3명을 그와 연루시켜
갖은 고문 끝에 각각 사형, 무기징역을 선고했던,
1975년 한신대 간첩단 사건을 아시는지요?

모진 고문을 당하고 간첩으로 몰려 선고받아 수년동안 복역하고
그후 보호관찰법에 시달리며 40년 동안 정신적 고통 속에 살아온
간첩조작사건의 당사자 세 분이 재심을 신청하여 지금 공판 중에 있습니다.
역사적 사법적 정의를 회복하기 위해 
다시 떠올리기에 잔인한 그때의 기억을 꺼내어 
독재정권의 국가공권력을 고발하고 있습니다. 

김명수 목사님, 전병생 목사님, 나도현 목사님이십니다.

지난 11월 10일(목)에 제1차 공판이, 11월 28일(월) 제2차 공판이 있었습니다. 
두 차례에 걸친 공판에서,
시대의 아픔으로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던, 세 분 목사님의 재심모두발언이 있었습니다.
법정 방청석을 가득 메운 모두의 가슴을 흔든 회한의 진술이었습니다. 

이제 재심 청구에 대한 선고공판(3차)이
12월 15일(목) 오전10시에, 서울고등법원 서관 302호에서 있습니다. 
총회 교회와사회위원회는 당일 오전9시20분, 법원 앞에서 작은 기도회를 가지고자 합니다. 

사법적 정의를 바로 세워서 이 사회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해 
재심을 신청하신 세 분 목사님들을 위하여 기도해주시기를 바라며,
교회와사회위원회에서 주관하는 기도회에도 많이 참석해주시어
힘을 보태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아래는 김명수 목사님의 재심모두발언 중에 발췌한 내용입니다. 전문은 본 홈페이지 커뮤니티 제안과나눔에 추일엽 목사님이 게시해주셨습니다.)

19751019일 신 새벽, 저는 아무 영문도 모른 채 4명의 정체불명의 요원들에 의해 연행되어 어디론가 끌려갔습니다. 눈을 가렸던 헝겊이 벗겨지자 건물현관 입구 위에 우리는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는 문구가 나를 섬뜩하게 했습니다. 남산 중앙정보부 대공분실이었습니다... 

국가 공권력이 특정 집단에 의해 사유화되면, 주권자 국민의 삶이 얼마나 송두리째 파괴될 수 있는가를 40년 전에 일어났던 제 사건과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당시 제가 관련된 재일동포 학생간첩단 사건을 기획하고 진두지휘했던 사람은 김기춘씨였습니다. 유신헌법을 초안했던 그는 당시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이었습니다.

19751122, 김기춘 중앙정보부 국장은 소위재일동포 학생간첩단 사건을 신문지상에 발표했습니다. 신문에 나온 제 사진 밑에는 간첩 김명수라고 기재되어 있었습니다. 졸지에 간첩 가족이 된 저의 부모형제들은 일가친척, 친지, 교회, 사회공동체로부터 완전히 격리된 채, 절망과 좌절 속에서 공포의 순간들을 보내야 했습니다...


E.H.카는 역사를 과거와 현재의 대화로 규정한 바 있습니다만, 과거는 현재와 단절된 것이 아니라, 청산되지 않은 과거역사는 반드시 현재에 되풀이된다는 것을 그는 말하고 있어요.

2015년 국정원에 의한 유우성씨의 간첩조작 사건을 보면서, 제 심정은 참담했습니다. 40년 전 제가 겪었던 트라우마가 저를 괴롭혔고요. 40년이 제가 겪었던 사건이 유우성씨 사건을 통해서 그대로 부활하고 있음을 보았기 때문이지요...


19744월에 유신정권의 위기였습니다... 유신정권은 한신대, 서울대, 고려대, 가톨릭대, 외국어대, 부산대학 등에 유학 온 재일동포학생들을 모두 하나로 엮었어요. 거대한 간첩조직망으로 만들었습니다. 전국적으로 번지는 유신철폐 민주화 학생운동의 배후에 바로 북한 간첩들이 있었다고 발표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학생운동을 잠재울 수 있다고 착각했던 것이지요...


중앙정보부 조서에 의하면, 생면부지의 김철현씨가 간첩이었음을 처음부터 인지한 상태에서, 제가 그의 지령을 받아 유신철폐 민주화를 위한 한신대학의 학생 시위를 배후조종했다고 꾸며져 있습니다...


김철현씨가 한국에 들어온 날이 1974410일이었어요. 한국말로 의사소통도 잘 안 되는 상태였어요. 13일이 지난 423, 그와 한두 번 만난 상태였는데요. 저는 이미 간첩이 되어있었고, 그와 함께 반국가단체를 결성한 걸로 나오고 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김철현씨는 누구였는가? ...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국에 유학왔다는 것, 국가 공권력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준 것이 아니라, 북괴 간첩으로 몰아 온갖 고문 끝에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것, 그는 복역을 하다가 사면되어 일본으로 돌아갔다는 것, 중앙정보부에서 당한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쇠약증에 걸려 정상인으로써의 생활이 불가능하다는 것, 지금도 그는 거의 폐인(廢人)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다는 것, 이것이 제가 알고 있는 김철현씨의 전부입니다...


제 사건에서 가장 치욕적인 일은 김기춘씨가 저에게 간첩혐의를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중앙정보부는 저를 간첩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협박했어요. 심지어 인천앞바다에서 공작선을 타고 황해도를 거쳐 평양에 들어가는 로드맵까지 그려주면서 시인하라고 윽박질렀습니다.

저는 취조를 받으면서도 이를 시인하는 순간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무의식적인 생존본능이 발동했습니다. 끝까지 저항했습니다. 너무나 완강하게 버티자 수사관들도 이를 포기하고 다른 방향으로 돌렸어요. 제가 국가기밀을 탐지하여 김철현씨에게 보고했다고 했습니다...


얼토당토않은 사실에 근거하여 김기춘씨는 저를 간첩으로 만들었고, 검찰 측은 국가내란죄를 적용하여 간첩으로 구형했고, 재판관은 간첩으로 선고했던 것입니다. 저는 무기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북의 지령을 받고 남한사회를 어지럽힐 목적으로 침투된무장공비에게나 해당되는 간첩혐의를, 당시 유신정권은 저에게 뒤집어씌운 것입니다...


제 사건일지를 가지고 김기춘씨가 청와대에 들어갔다가 온 후, 수사관들은 저를 서울구치소가 아니라 지하 고문실로 데려갔습니다. 3주 동안 그곳에서 취조를 받았습니다. 개돼지 취급을 받으며 강도 높은 취조를 받았어요. 20일 동안 밤잠을 자지 못하게 했어요. 온갖 고문과 언어폭력으로 몸과 정신이 완전히 망가지고 탈진한 상태였어요. 지하실에서 나올 때는, 저는 간첩이 되어 있었습니다. 제 나이 스물여섯이었습니다...

 


저는 제 인생의 황금기인 20대 후반을 교도소에서 보냈습니다. 44개월 동안 0.78평의 독방(獨房)에서 살았어요. 서울구치소, 대전교도소, 대구교도소를 전전하며, 그야말로 산다는 것 자체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하늘을 볼 수 있는 운동시간은 하루에 30분이 고작이었고요. 교도관들에게 구타를 당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영양실조로 두 눈이 거의 실명상태가 된 적도 있었고요. 부패된 음식을 먹고 식중독에 걸려 사경(死境)을 헤맨 적도 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

저 개인 한 사람의 희생으로 족합니다. 앞으로 우리 역사에 더 이상 간첩조작사건과 같은 불행한 역사가 되풀이 되지 않고, 더 이상 저와 같이 희생당하는 주권자 국민이 나오지 않도록 사법정의(司法正義)가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어주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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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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