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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위클리뉴스>백두산 호랑이와 같이 유라시아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한신인을 꿈꾸며2-2

한신대학교 (기타,,기타) 2020-05-05 (화) 21:35 4개월전 304  




송창근 목사와 함께 장준하.jpg

<한국신학대학 졸업식: 송창근 목사, 박봉랑 그리고 장준하>


 

한신위클리뉴스장준하 선생이 쓰신 글 돌베개에 보면 1944년 학도병으로 가시다가 탈출해, 중국대륙 6천 리 대장정을 하시고 난 후에 광복군에 합류하셨습니다. 아버님께 그에 관해 여담이나 들으신 바가 있으시면 말씀 부탁드리겠습니다.

 

장호권 선생, 그거는 제가 돌베개를 쓰실 때, 간헐적으로 어깨너머로 보고 들은 바는 있습니다. 그러나 장 선생님은 자신이 상상도 못하게 힘든 그 고난의 길을 그렇게 혼자 걸어서 온 이야기를 집안 식구들에게는 안했어요.

그냥 독립군이고 광복군을 지냈고 일본군을 탈출하셔서 가셨다그 정도지. 그분이 어떤 식으로 어떻게 했다는 구체적인 얘기는 집안에 하지를 않으셨어요. 솔직히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그냥 우리 아버지는 광복군이고 일본에 탈출해서, 6천 리를 걸어서 김구 선생이 있는 중경에 가서 광복군 해서 들어갔다!” 그 정도지 구체적인 내용은 아이들이나 가족들에게 일절 안하셨어요. 대단한 분이죠. 또 어떻게 보면 굉장히 이기적이신 분이시기도 하시고. (웃음)

그런 내용을 가끔 저희 어머님을 통해서..., 어머님 한테서 듣는 얘기는 항상 돌베개’, 성경에 나오는 야곱의 광야에서그 돌베개를 넣은 편지를 내가 받았다그 받는 중간에 도망가셨구나, 탈출했구나..., 결혼하고는 일주일 만에 입영 가실 때 내가 만약 편지를 보냈을 때 편지 내용에 성경에 나오는 얘기가 있으면, 탈출 한 줄 알아라그게 그 두 분 만의 암호였던 거죠. 편지 오는 걸 보다가 야곱의 돌배게...,’ ‘, 탈출했구나.’하고 아셨다고 해요.

 

 

한신위클리뉴스광복 후, 194511월 임시정부 제1진으로 김구 주석의 비서 겸 광복군 대위로 환국하셨는데요. 군인으로서 계속 복무했을 법도 한데 군인이 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일까요?

 

장호권 선생그거는 그렇게 보시면 됩니다. 장준하 선생님께서는 신학을 하셨잖아요. 그 다음에 미군 OSS 훈련을 받을 때 군사훈련도 잘 받으셨어요. 그 군사훈련을 잘 받은 덕분에, 그 덕분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훗날 장 선생님이 국회 국방분과 의원을 하실 때, 월남(베트남)을 한 번 방문 하셨는데 그때 최명진 장군이 어떻게 그렇게 선비 같은 장준하라는 인물이 군사작전도 잘 아시냐.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그런 얘기를 들은 바가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볼 때 장 선생님은 해방 후에 남북이 갈라진다는 생각보다는 해방에 들어와서 물론 미군이 들어와서 또 다른 식민지를 만드려고 장난을 치기는 했습니다만, 들어와서 첫 번째 생각하신 것이 국민이 깨어나야겠다. 그런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일단 국민에게 지식을 전파하는 일, “그것을 가장 빠르게 할 수 있는 것이 책이다.” 해서 원래 탈출 해 가지고 임시정부를 찾아가는 과정에 있는 책을 2권을 내셨어요.

하나는 등불이고, 또 하나는 재단이라는 책을 냈죠. 그때 장 선생님은 이 언론, 이 지식을 갖다가 전파하는 데는 그것이 가장 빠른 방법이고, 그 당시 우리 국민들은 아직 깨어나지 못했으니까 깨어나게 해야 한다. 그래서 펜을 드셨던 것 같아요.

광복군 때 군인이었으니까. 그리고 또 가장 깊이 본인이 생각한 것은 일본이라는 나라가 왜 저렇게 전쟁을 일으키고, 국제화 되어 가지고..., 남의 나라에서 난리 치고 중국까지 침략하고..., 식민지 만들 수 있었는 것은 그들이 먼저 깨어났기 때문이이었다고 생각했죠. 비록 우리가 별로 바람직한 건 아니지만. ‘명치유신(明治維新)’으로 깨어나고 세계화하면서 각종 지식을 받아들이고, 총 만들고 뭐 난리 치고 그러니까 그런 짓을 할 수 있었던건데. 우리 국민은 그때 뭐했을까? 깨어나야겠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아요.

 

해방 후, 장준하는 문동환의 권유로 한국신학교에 편입해 졸업하였다. 이즈음 문동환은 일본유학시절 관동조선신학회에서 함께 공부하던 신학생들을 중심으로 진보적인기독교인들의 모임을 만들었다. 1948년에 만들어진 복음동지회라는 모임이었다. 연세대, 감신대, 루터대, 한신대, 장신대 등의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인들의 모임에서 문익환과 장준하는 깊은 교류를 하게 된다.

 

한신위클리뉴스장준하 선생께서는 우리 한신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셨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은 대체로 목사가 되는 것이 보통인데, 신학을 공부하고도 목회자가 되지 않고 재야 정치인으로서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펜을 드셨는데요. 좀 전에 조금 말씀 하셨습니다만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장호권 선생글쎄요, 좀 전에도 말씀드렸듯이 그것이 그분의 뜻이었는데. 그때 제가 이건 조금 빗나간 이야기입니다만. 장 선생님이 펜을 들고 그런 다음에 정치를 하게 된 동기가 있었습니다.

근데 그땐 제가 어리지만 어느 정도 성장을 했었을 때고 장 선생님 옆에는 문익환 목사님이 계시고 그 밖에도 여러 목사님들 뭐 많이 있었죠. 그 분들은 목회자의 길로 가셨어요. 장 선생님은 목회자의 길로 안가고 언론 쪽으로 가셨죠, 처음에.

책을 만들어내고 그러다가 48년도에 한신 가서 공부를 마치고 이렇게 하셨습니다만, 결국 자신은 목회보다 말씀 드린대로 언론 쪽에 종사를 해야겠다. 그래서 잡지를 내셔가지고 물론 목사님들이랑 교류를 많이 했죠. 그래서 그 때 문익환 목사님이라던가. 이런 분들이 수유리에서 복음동지회라는 거를 만들었어요. 목회하시는 분들이 전부 다 모여서 거기에 저도 이렇게 참석하고 아버님 쫓아서 가고 그랬습니다만.

목사가 아니신 분이 거기에 가서 관계를 많이 하시고, 친분을 쌓으시고 하다가..., 언론을 쭉 하시다가 재야인사와 정계에 들어가게 된 동기는 소위 친일의 뿌리를 둔 그 당시 위정자들이 장준하 라는 사람과 그 사람이 발행 하는 <사상계>가 자기네들의 정체성을 벗겨놓으니까, 그게 이제 두려웠던 거죠. 그래서 상당한 탄압을 하기 시작하죠? 그래서 사상계를 죽이는 방법, 장준하 선생님을 비리, 부정 언론인 이런 식으로 해 가지고 엄청 고생시키죠. 그렇게 사상계 문을 닫습니다만, 이것 때문에 그러한 지경에 오니까 그들과 싸우고 언론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결국 현실참여 아니겠는가. 정치 참여 아니겠는가... 사상계 사장실에서 신민당이 창당이 됩니다.


장준하(남산의 연설).jpg

<남산에서 선거유세 연설 중인 장준하 선생>

 

한신위클리뉴스장준하 선생은 펜으로 군사독재정부와 맨몸으로 투쟁하신 분 입니다만, 아드님이신 장호권 선생님께서 쓰신 글에서는 월남파병 결정이 난 후 악법도 법이다라고 하시고 승복하시고 아들을 월남에 군인으로 보내셨다고 하셨는데, 그러한 말씀의 배경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장호권 선생그거는 그냥 한마디로 하면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그런 생각을 갖고 계시던 분 같아요. 그 당시 월남파병이 결정되고 했을 때, 대한민국의 고관대작들의 자제들은 다 군대를 뺐어요. 그러니까 힘 없는 백성들의 자식들만, 그냥 머 다 월남 가서 많이 죽었죠.

그때 아버님은 월남파병을 엄청 반대하셨어요. 그 당시 사진에도 보입니다만 몸에다 끈을 묶고 월남파병을 반대한다고 광화문에서 힘겹게 싸우시고 하다가 그들이 이제 불복으로 그냥 비정상적으로 통과를 시켰죠. 일단 통과를 시켰는데 뭐 어떻게 할거에요? 악법도 법이니까...

고관대작(高官大爵)들의 자식들은 다 빼니까 이럴 순 없다 해서 자신의 자식을 먼저 보냈죠. 그런데 저희 집안에 장 선생님 처남들도 있었는데, 제 어머님 동생들이죠? 남자 둘, 직계 가족 하나만 빼고 셋이 다 군대에 보냈어요. 월남에 다 보냈어요.(웃음) 하나는 청룡부대로 보내고, 하나는 육군으로, 하나는 해군으로, 다 보냈어요!

 

한신위클리뉴스선생님은 어디로 갔다 오셨어요?

 

장호권 선생저는 해군으로...

 

한신위클리뉴스장호권 선생님께서는 아버지 장준하 선생의 권유로 월남전에 파병되어 다녀오셨는데요. 본인은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는지요. 또 월남에서 근무하시던 때의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장호권 선생(웃음) 저는 해군으로 월남에 갔는데, 나뜨랑(Nha Trang) 해변에 날 떨구어 놓고 그냥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그 배를 찾으러 월남 전역을 돌아다니고 그러다가 육군 백마부대라는 곳에 가서, 거기 있다가..., 야간공습 받아가지고, 제가 약간 다쳐서 후송됐죠. 그러니까 제가 왜 거기서 고아가 되어야 했는지 나중에 또 얘기가 나오겠습니다만, 거기에는 상당히 큰 음모가 있었다는 걸 제가 나중에 알게 되었고, 하여튼 간에 우리 식솔들 장 선생님이 데리고 있던 식솔들 3명이 모두 월남에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청룡부대 갔다 온 외삼촌은 갔다 와서 돌아가시고...,

 

한신위클리뉴스, 그 이후에 지병을 얻어서 돌아가신 겁니까?

 

장준하는 국가원수모독죄로 투옥된 상태에서 국회의원으로 옥중 당선되기도 하고, “유신헌법의 민주적 개정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하여, 불과 열흘 만에 무려 40만 명의 서명을 받아내기도 했다. 그리하여 유신 대통령 박정희와 대적하는 재야 대통령 장준하라 불리게 된 터라 둘 사이에는 공적이면서도 사적인 갈등이 한없이 증폭되지 않을 수 없었다.

악명높은 긴급조치 제1호의 발동은 이러한 장준하를 겨냥한 것이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역시 가장 먼저 장준하가 체포되었다. 그리고 문동환과 안병무가 정치교수 1호가 되어 1975612일자로 한신대학교에서 쫓겨나고 서남동, 이우정, 이문영 등이 차례로 실직 교수가 되었다.

 

장호권 선생, 큰 외삼촌은 저랑 나이가 같은데..., 육군으로 갔다가 1년 복무하고 살아서 돌아오셨죠. 그때도 재미나는 게 그 외삼촌이 월남에 파병되었을 때 장 선생님이 국방분과 국회의원이었는데, 그때 월남에 시찰을 가셨어요, 갔는데 그 처남이 월남에 와있으니까 국방부에서 그 이렇게 해서 만나보게 하려고... 그렇지 않습니까. 그때 최전방에서 싸움을 하고 있는데, 저희 불러내더니 군복 갈아입히고 나서 세워놨는데. 국회의원들이 와서 이렇게 보니까. 처음에는 깜짝 놀래가지고..., 어떻게 날 좀 살려 주는가보다 했더니 건강하냐?’, ‘그렇습니다’, 했더니 알았어하시고, 그냥 가시더라고요. 하하하하하하 (다 같이 웃음)

 

한신위클리뉴스그때가 장준하 선생님 국회의원 하실 때 아닙니까?

 

장호권 선생. 그때 국회의원. 그러니까 월남 갈 수 있었던 거죠. 국방부 시찰 간거죠 그때. 뭐 그런 에피소드가 있고 그러니 그 외삼촌도 거기 와서 조금이라도 무슨 위로해주고 어떻게 뒤를 좀 막말로 빼줄까 생각했는데 그렇게 세 마디만 하고 그냥 돌아가시더라는 거죠. (웃음)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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