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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신위클리뉴스>백두산 호랑이와 같이 유라시아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한신인을 꿈꾸며2-1

한신대학교 (기타,,기타) 2020-05-05 (화) 21:01 4개월전 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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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 번째 이야기> Hanshin Weekly News

 

흐드러지게 피었던 벚꽃이 산들거리는 봄바람에  휘날리며 떨어집니다.

온 국민의 열화와 같은 바람 덕분인지 코로나 19 바이러스의 위세가 한풀 꺾이고, 설레임으로 가득한 한신대 교정에는 원격화상수업을 위해 준비하시는 교수님들과 원격화상수업 지원을 위해 분주한 일상을 보내고 계시는 교직원께 격려의 박수를 보냅니다. 이대로라면 이제 곧 교정에서 재학생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부풀어 오릅니다.  




백두산 호랑이와 같이 유라시아 대륙을 향해 포효하는 한신인을 꿈꾸며2

- 평화대장정, 장준하 선생의 장남 장호권 선생께 듣는다! -

 

 

한신위클리뉴스는 지난 대한민국 21대 국회의원 총선이 있었던 415() 고 장준하 선생의 장남이시며, 현재 광복회 서울지부장이시며, 한신대학교 초빙교수로 수고하고 계신 장호권 선생을 찾아뵙기 위해, 서울의 합정동에 자리한 광복회 사무실을 찾았다한신위클리뉴스 기자단이 도착하자  선생께서는 광복회 건물 밖까지 나와 기다리시고,  반갑게 맞아 아늑한 사무실 안으로 안내해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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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 사무실에서 장호권 선생과 인터뷰 광경>


 

먼저, 아드님이신 장호권 선생과의 인터뷰에 들어가기 전에 고 장준하 선생에 대해 간단하게 알아보기로 하자.

 

장준하(張俊河, 1918-1975)선생은 평안북도 의주 출생으로 독실한 기독교 장로였던 조부 장윤희에게서 배웠으며, 민족의식이 투철한 부친 장석인의 영향을 받아 자랐다. 1941년 일본의 토요대학(東洋大學)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일본신학교(현재 동경신학교東京神學校)로 전학하여 신학을 공부했다. 이곳에서 문익환, 문동환, 전경연, 박봉랑 등과 만나게 되었다.

1944년에는 광복군에 합류하기 위하여 학도병으로 자원하여 탈출해, 중국대륙 6천 리 대장정을 거쳐, 1945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착했다. 19452월부터 국내 진입작전을 위한 OSS(미국전략첩보대) 특수훈련을 받았으며, 광복 후 임정 1진으로 귀국하였다. 이후 문동환의 주선으로 1948년 봄 한국신학교(현재 한신대학교)에 편입한 장준하는 만학에 열중하여 6개월 만에 졸업장을 받으며 신학 공부를 마칠 수 있었다. 한국전쟁 당시에는 피난지에서 4.19혁명의 단초가 된 사상계를 창간, 한일국교정상화반대, 베트남전쟁 파병 반대 등 민주화 운동에 앞장서다가 수차례 투옥되기도 하였다.

1967년 중에는 국회의원에 출마해 제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며, 19741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투옥되어 15년 형을 선고 받았다가 12월에 형 집행정지로 풀려나기도 하였다. ’재야의 대통령이라는 별명으로 민주화 운동을 주도하다가 19758월 경기도 포천 약사봉에서 의문사로 생을 마쳤다. 1993년 제1회 한신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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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선생에게서 물려받은 윤봉길 의사의 태극기 앞의 장준하 선생>


 


한신위클리뉴스안녕하십니까? 한신대학교 개교 80주년을 맞아서 백두산 호랑이와 같이 유라시아 대륙을 포효하며 달리는 한신인을 꿈꾸며라는 제목으로 재학생들에게 꿈과 도전의식을 심어주고, 우리의 나아갈 방향을 알기 위해서 기획기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장준하 선생을 생각하면 백두산 호랑이의 기질을 가지신 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오늘은 특별히 아드님으로서 곁에서 바라본 장준하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찾아 왔습니다.

 

장호권 선생 , 이렇게 찾아주셔서 감사드립니다.

 

한신위클리뉴스외랍됩니다만, 먼저 아드님으로서 보신 장준하 선생님 소개를 좀 부탁드리겠습니다.

 

장호권 선생저는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사실은 특별하게 드릴 말씀이 별로 없어요. 왜냐하면 저의 선친이신 장준하 선생님은. 제가 선생님이라고 해요. 요새는 아버님이라고도 하긴 합니다만. 항상 선생님이란 호칭을 사용하였고, 제가 어린 나이에 아주... 초등학교 때는 아버님이라고 호칭을 했습니다만, 부자지간에 손잡고 나와서 무슨 야구를 한다던가, 즐거운 게임을 한다던가, 그런 기억이 전혀 없어요. 어렸을 때 그저 굉장히 엄하신 분, 왜냐면 옆에 있지만 어떤 사상이라던가, 국정이라던가, 사회문제라던가, 함께 논하는 나이가 아니니까. 그냥 어렵고 그런 분이셨죠.

그리고 항상 선생님 주변에는 신문에 나오시는 분들이 많이 찾아오셨어요. 그래서 장준하 선생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기억은 별로 없습니다. 그런데 제가 성장을 하고 나서 사회인이 되고..., 장 선생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 분이 저에게 베풀어 주셨던 것이 특별한 것이었다하고 생각되는 정도입니다.

 

한신위클리뉴스탄생 100주년 기념문집의 글을 유심히 읽어보았습니다만, 특별히 아드님으로서의 바라본 아버지 장준하의 모습과, 공인으로서 장준하 선생으로서의 모습이 이분화 되신다는 말씀을 하셨는데요. 그 이야기를 좀 더 듣고 싶습니다.

 

장호권 선생글쎄요, 그걸. 가족으로서 보는 것, 자식으로서 보는 것하고, 그리고 공인으로서 사회인으로서는 차이가 있어요. 조금 전에 말씀드렸듯이 자식으로서 아버지, 부자지간에 있어서 그분을 볼 때는 정말 기억나는 게 별로 없어요. 그래서 제 나름대로 세운 것이 근자에 와서 나라와 민족과 이런 것을 정말 고민하고 생각했던 마음이 있었고, 그것에 대해서 헌신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다면 “‘제가(濟家)’는 포기해야 된다.”고 생각해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란 말이 있는데, 저는 요새 또 이 시국에 이렇게 보게 되면 정말 나라 꼴이 뭐 보통 힘든 게 아니지 않습니까? 위정자들이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그래서 볼 때 정말 사실 우리나라는 아직까지도 완전 독립이 되지 않고, 또 남북이 갈려있고, 이런 상황에서 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고민하고 또 거기에 전념할 생각이 있는 정치인이라면 이런 얘기는 뭐 하지만, ‘제가는 좀 빼야 되겠구나. ‘수신(修身)’을 한 후에 곧바로 치국(治國)’을 논해야지. 요즘 문제 되는 모든 것이 제가에서 나온단 말이죠. 식솔들을 거느리고 있으면 그걸 돌보느라고 원래 해야 될 일에서 옆길로 나가기도 하고, 그 자식들이 아까워서 또 자기 집안 식솔들이 그래서, 거기다 눈길을 돌리고 보호하려다 보니까 진작 국가와 또 국민에게 보여줄 수 있는 자기상이 흐트러지게 되죠.

저는 그런 얘기하면 좀 그렇습니다만, ‘수신곧바로 치국으로 가야 한다. ‘제가를 할 수 있느면 하지 말아라. “만약에 나라를 경영하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래야 되지 않느냐?”생각합니다.

 

한신위클리뉴스처음 듣지만 뼈있는 말씀이십니다. 그래서 장준하 선생께서는 그래도 나라를 우선으로 걱정하셨던 분이다라고 생각해도 괜찮겠습니까?

 

장호권 선생그분에게는 그런 것 같아요. 또 얘기를 여러 가지로 나눠서 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분이 태생적으로 할아버님이 목사님이셨고, 그러니까 저희 할아버님 되시죠? 증조부님께서 장로님이셨고, 신학문과 종교를 받아들이면서 거기서 배운 청교도주의적인 사고, 그리고 그 당시에 태어나서 어린 시절에 환경이 식민지인에 대한 울분, 그것을 접할 수 있는 학교생활에서의 여러 사건들. 그런 것이 그분의 마음을 굳혀놓은 것 같아요.

열네 살 짜리가 그 당시 이북입니다만, 시내에 나와서 걸어가다가 사진관에 대한민국 전도가 걸려있는 걸 보고 사진을 하나 찍자!” 그래서 대한민국 전도를 옆에다 끌어안고 사진을 찍는데, “왜 그걸 가지고 사진을 찍느냐?” 물어봤더니 나는 오늘부터 여기랑 결혼했다.” 그래서 저는 훗날 그런 얘기를 했습니다. 장준하 선생은 이미 열네 살에 결혼을 하셨다고,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와 이미 결혼하셨기 때문에 내 입장에서는 어떻게 보면 후처의 자식이니까 내가 적자는 아니구나. 그런 농담을 했습니다. (웃음)

그분에게는 첫 번째 부인이 대한민국이었으니까. 그 정도로 어린 나이부터 그런 마음을 굳혔던 거죠? 그러니 그분의 생활이라는 것이 자라나면서 탈출해서 나라 찾는 광복 운동을 해야겠다. 그리고 육천 리 길을 걸어가서 탈출하고, 독립운동을 해야겠다고 해서 김구 선생과 함께 처음으로 여의도에 비행기를 타고 들어왔지 않습니까? 우리나라 역사에도 안 나와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는 건데, 그때 김구 선생님께서 장 선생님을 장 목사라고 불렀대요. 그때 25살인데 신학을 하고 그랬었기 때문에 장 목사라고...,

 

문익환 목사의 동생인 문동환은 동경의 일본신학교 동기생으로 처음 만났다. 불과 4~5개월의 짧은 시간을 함께 했지만, 유달리 가깝게 지냈다. 이 때는 대동아전쟁이 일어나 일제가 조선 청년들을 무작위 전쟁터로 보내던 때였다. 이후 장준하의 행적은 대서사시를 방불케 하였다. 자신의 자서전 <돌베게>에 낱낱이 밝히고 있듯이 일본 학도병으로 군부대를 탈출하여 중국 대륙 6천리 대장정을 감행하였다. 해방이 되어 김구 주석의 비서 겸 광복군 대위로 환국한 장준하의 모습은 문익환의 눈에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였다.

 

한신위클리뉴스목사 안수는 안 받았지 않습니까?

 

장호권 선생안수는 안 받았는데, 일본신학교를 다녔거든요. 그리고 나중에 한국신학교를 다녔죠. 그때 김구 선생님께서 호칭을 장 목사, 장 목사라고 불렀답니다. “장 목사 같은 사람이 살아남아서 훗날 해방이 된 후에 나라에서 큰일을 도모해야 될 인재다. 그러니까 적진에 가서 절대로 죽지 말라고 당부 했답니다


<계속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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