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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의 관점에서 보는 단상 : 바이러스와 신체정치학

임창세 (서울노회,용산제일교회,목사) 2020-12-21 (월) 19:10 3년전 1877  

코로나 바이러스와 신체 정치학

-공공신학에서 보는 단상-


정승훈 교수 (Affiliate Distinguished Professor at LSTC)


팬데믹이 스치고 가는 현실을 보면서 버클리대학의 공공신학 센터는문명사의 전환기의 현상을다루는 중요한 포럼과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역사에서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바이러스가 아니라, 어쩌면 유전공학(Genetic engineering) 더불어 이제는 이상 사라질 수가 없다고 말한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자연계와인류의 삶에 마지막까지 동반되는 현상이 것으로 전망하는 사람들이많다. 인류의 삶과 자연이 공동으로 진화(co-evolution)한다는과학자들의 주장이나, 인간은 이제 과학기술을 통해 피조된 창조자(created co-creator) 자리에 들어가서 하나님의역할을 해야 한다던 낙관주의자들의 소리가 무색해진다.

미국에서 공론장은 완전히뒤바뀌고 있다. 백신접종이 되더라도 집단면역이쉽지 않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말한다. 시민사회는 정보기술을 토대로대면의 소통에서 (ZOOM)으로 전환된다. 시민 사회에는 다양한 공론장이 존재한다. 정치영역, 경제영역, 문화영역, 교육영역, 종교영역 다원화가 되어있고 전문영역으로 구축된다. 물론 여기는 사회적 분업과 합리화를기초로 사회 계층이 만들어진다.  이러한 공론장의 계층화를보면서 공공신학은 시민들의공공의 선과 정의 , 심의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 안전망에서 밀려나간 하위계급(subaltern)과의 연대를 모색하려고 한다. 

공공 지식인들의 도덕적 역할을 기대하기도 한다. 이상 정치화된 공공지식인들을 신뢰할 없다는 비판의 소리가 쏟아져 나오기시작한다. 기껏해야 정권의 이데올로기로 전락하기때문이다. 그래서일까 ? 에밀 뒤르캥(Emile Durkheim) 사회학에 지대한 관심이 주어진다.  도덕은 사회적이다. 사회적 연대를 위해 공공 지식인은 자신의 소명을 책임적으로 현실화해야한다. 막스 베버(Max Weber) 역시 자본주의 합리성의 비극적결말이 쇠우리 창살로끝나버리는 병리적 현상에아연실색했지만 정치가 들에게서책임윤리를 지키고 종교에서드러나는 예언자적인 심정윤리를고려 하라고 말한다.  그래서 종교에 거는 기대가 뒤르캥이나 베버 역시 지대하다. 한국에서 기독교는 시민사회안에서 생활세계를 지키면서이러한 소명의 정치를감당할 수가 있을 ? 책임과 종교의 심정윤리가 결합된교회의 태도는 무엇일까?

기독교장로회는 장공으로부터 일찍이자유의 숨결을 받았던후예들의 공동체이다. 그런가하면 역사에서 밀려난민중들을 역사의 주체로고집하면서 지금까지 하위계급들과연대를 하면서 살려고노력하는 믿음의 공동체이기도하다. 그러나 우리는 시민사회의 문제를, 나아가 심의 민주주의와 도덕의 문제를 얼마나 중요하게고려하는가? 이것은 신학적으로 성화의 문제에속한다. 하나님은 사회의 정결한 삶을 요구하신다. 그것이 토라이고 여기에 올인한사람들이 예언자이다.  저명한 유대인 신학자인 아브라함헤셀(Abraham Heschel) 역시 예언자는 하나님의 영과 토라에 붙들린 자들이고 이것을 향해 메타노이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우리가 알고 있지만, 아는 것만큼 실천이 안되는 내용이기도 하다.

프랑스 사회학자인 피에르부르디외(Pierre Bourdie) 버클리 대학 강연에서 사회계층을 파악하는매우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그에 의하면 이상 신분과 계급은 나누어질수가 없다.  다원화된 공론장에서 자본의 내용은단순히 경제를 기초로파악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면 설령 경제적으로 빈약하더라도 문화자본을 가지고 있다. 내가 종교인이라면 경제적인 부와는 상관없지만사회로부터 누리는 신분, 목회자로나 신부로서의 상징자본이 있다. 인간관계를 풍부히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사회자본을 통해 중요한 신분을 획득한다. 나의 할아버지가 독립운동가라면 나는 설령 정치를 못해도 시민들이 승인해주는 명예의 자본도있다. 우리가 사는 시민사회의 성격은 나라마다 민주주의 전통과 사법의 영역과문화적 발전이 다르겠지만 마디로 말하라면 그것은 도덕사회이다. 사회가 도덕이라는 말은 이상하기도 하지만 뒤르캥의핵심사상이기도 하다. 독재와의 투쟁에서 기장의많은 목회자들이 것은 정치사회였다. 그때 정치사회와 함께 더불어 면면히 흐르고있는 시민사회와 도덕의 주체로서 시민의 삶을 단순히 부르즈와지 경제사회로폄하해버리지는 않았나?

여기서 생활세계가 중요해진다. 개인의 생각, 의식, 판단에 앞서 존재하면서 끊임없이 나에게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한스 가다머(Hans Gadamer) 영향으로서의 역사를 말한다. 역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사회의 조건도 문화도 개인의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삶의 형식 들에는 기본적인 문법이있다. 사람들은 사회계층화된 다양한 공론장에서신분과 자본을 향해 경쟁을 하면서 산다. 그러나 나름의규정과 문법을  안다.  이것이 법의 정신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시민사회로 구성되기도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계급을 강조한 마르크스를폐기처분할 필요가 없다. 적어도 마르크스는그의 추종자들과는 달리 계급에 대한 유연한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가하면  신분의 중요성을 직시한 베버 역시 경제사회에서 드러나는 계급문제를 무시한 적이 없다.  사회계층의 공론장에서 대립이 아니라같이 숨쉴 수가 있다.  

계급운동을 강조한 사람들은의식화를 강조할 것이다. 혁명과 해방의의식화를 통해 사회변혁이 가능할 것으로 보고 계급투쟁의 주체를 노동자나농민 아니면 하위계급들의 동맹에 두려고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치명적인 결함은인간은 침전되어온 사회와문화의 습속(habitus) 지배를 당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있다.  어느  민주투사가 하룻밤 사이에미투를 당해 성추행범으로 전락하고 시민사회에서 퇴출되는사건들은  습속의 현상학의 관점에서보면 씁쓸하다.

 이러한 사회학적 논의들은바이러스와 백신 그리고 공중보건에 대해 어떤 공공신학적 함의를 갖는가? 인간의 습속은의식이 아니라 신체지배로부터형성된다. 이러한 지배방식에서부터 해방되지 않은 해방된 의식을 구호화 한다고 해서 개인이나 사회가 변하지는않는다. 말로 해서 되는 것이라면 누구는 못할까?  왜냐하면 사회는 인간의 의식보다 크다. 그러나 쉽게 망각하고 산다. 사회와 문화안에 침전되어온 편견들과불명료함 그리고 여전히억압적인 것들의 지배를받는 자들이 사회를 개혁한다는 것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 것이다.  

미국의 공중보건을 다룰 미국사회는 역사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침전되어온편견과 백인 중심 체제를 가지고 있음을고려해야한다. 이러한 습속에서 벗어나지 않을 경우 백신접종은 나름 효율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인 불신과 저항을받을 밖에 없다.  역사적으로 공중보건은 인간의신체를 다루어 의학 집단의 전유물로 여겨지기 보다는 국가가국민의 삶에 행사한 신체권력의 차원에서 파악된다. 무슨 말인가? 국가는 국민의신체에 무제한의 권력을행사할 있는 특권과 지배방식을 가지고있나? 미셀 푸코(Michel Foucault)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의 주저인감시와 처벌그리고성의 역사 1”에서 푸코는 신체에 대한 국가 권력을 역사적으로 분석하면서 비오폴리틱(biopolitics)이란 말을 사용했다.  

그리스어에서 또는 생은 비오(bio) 조에 (zoe) 구분되고 비오를 사회적인 또는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삶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파악했다. 인간은 정치적동물이란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에서처럼정치는 인간의 신체와관련되고 위계질서적으로 파악된다.   이런 점에 착안한 사회 철학자는 독일계 유대인 출신인 한나 아렌트로 평가되지만, 이것을 인간의 신체에미치는 국가 권력으로 발전시킨 사람은 단연 푸코로 꼽힌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규정한 정치적동물로서의 인간은 이제 푸코에게 국가 권력이 인간의 신체에 무제한의공권력을 사용해도 된다는지배방식으로 뒤바뀐다. 도대체 국가가 뭐길래이토록 엄청난 신적인권세를 갖는다는 말인가?

토마스 홉즈(Thomas Hobbes) 그의 정치철학에서 국가를 신적존재인  리바이어던으로 부른게  맞는 걸까? 만인 만인의 투쟁을 기초로 국가는 전영역에서안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제권력을행사해도 되는가? 슈미트(Carl Schmitt) 홉즈를 독일 파시즘의 기초 이론으로 갖다 붙여서 이것을 정치신학으로 불렀다. 여기에 목숨 걸고 투쟁한 것이 고백교회이고, 바르트, 본회퍼, 틸리히가 아니었나? 틸리히의 초기 저작인 사회주의 결단은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고 바르트의 제자인 헬무트 골비처는 이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백교회의 전통과 파시즘에 저항하는새로운 정치신학이 몰트만과매츠를 통해 이어지는 예언자적인 유산을 기독교장로교는 받아들였다.  비록 교세는 적지만 마지막시대에 하나님이 남겨놓은자들로 자기정체성을 확인하면서살지 않았나?  그러나 지금은?

21세기 팬데믹으로 인해 문명사가 뒤바뀌는 시점에 지금 우리의 정체성의 깃발은 어디를향해야 하는가? 시민사회를 어떻게 이해할것인가? 공론장은 무엇인가? 교회는 시민사회 안에 존재한다. 위르겐 하버마스(Jürgen Habermas) 들여다 필요가 있다.  시민사회와 정치사회, 그리고 경제사회의 구분은헤겔 마르크스 전통에선 기대하기가 어렵다. 헤겔은 시민사회를부르즈와 경제사회로 파악했고경제 사회에서 빚어지는 노동쟁의와 갈등문제를 이성적인국가개념에서 해결하려고 했다.  헤겔 역시 국가를 만인 만인의 투쟁을 해결하기위해 존재하는불멸의 신과 같은 리바이어던이라는 토마스 홉즈의국가론에 동의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인정투쟁이라는 변증법적 모델은시민운동을 위해 여전히 중요하고 실천전략을 위해 유효하다.

마르크스는 헤겔의 이해를무비판적으로 수용했고 우리가사는 경제적인 삶이 억압과 불공정으로 각인된필연의 왕국이며 가진 자들의 폭력의 지배로얼룩져 있는 이곳을 출애굽해서자유의 왕국으로 가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그가 꿈꾸던 자유의 왕국은계급 없는 사회 또는 생산자들의 결사와 연대에 기초한 공동체가아니라 관료제의 타락과인권의 몰락, 권력 엘리트들의 횡포로 인한 일인독재나 군주제 형식의 리바이어던으로 막을 내렸다.  사회주의는 인종 민족주의를 근거로 군주제로 전락해야하는가?  마르크스는 아마도 이것을보고는 무덤에서 돌아 눕지 않을까?

지점에서 하버마스가 국가라는 정치사회와 경제사회그리고 매스 미디어 영역을 체계(system) 말로 포섭하고, 이와는 다른 시민사회와 시민의 그리고 문화의 영역을생활세계로 파악한 것은 중요하다. 물론 이러한 하버마스의 체계와생활세계의 이분화에는 공론장에서생활세계를 지키려는 그의 소통의 정치학이나 또는 인정의 정치학이 가동된다.

하버마스에 앞서 안토니오 그람시(Antonio Gramsci) 정치사회와 시민사회를  구분하고 시민운동에 절대적인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람시는 공론장의 차원을보지 못했다. 하버마스는  그의 교수자격취득논문에서 공론장에 주목했고 18세기 이후 시민사회의 계층에서 다양한 영역의 세계가발전해왔는지 추적을 한다. 시민사회가 가능해지려면심의 민주주의가 요구된다.   이러한 민주주의는 이상 국가가 중요한 입법을 의회제도를 통해 일방적으로 없다고 못을 박는다. 의회에서 다루어지는 중요한경제나 정치적 개혁의어젠다는 시민사회에 투명하게공개되고 시민의 참여 민주주의를 통해 승인되거나 발의되어야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정치 사회가 시민사회와 만나고 합의의과정을 거칠 , 비로소 하버마스가말하는 심의 민주주의는 가능해진다. 물론 이것은 고전적인 국민주권이라는근대정치론에 대한 진일보한 차원을 말한다. 이러한 심의 민주주의를  우리는 고전적으로 장자크루소나 임마누엘 칸트에게서만나기도 한다.

미국에서 백신접종에 대한 거부는 흑인 공동체에서 강하게 나타난다. 백신연구과정에서  비민주주의적인 참여도로 인해 백신의 부작용이 특히 흑인들에게 나타나기도 한다. 백신을 개방하고 승인하는 전문위원회의절차에서 흑인 의사나 전문가는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습속의 현상학이 여전히 건재한다. 비오폴리틱 시대의새로운 인종차별주의?—일부 사회학자들은 그렇게 진단하기도 한다.

결국 이러한 사태는 백신에 대한 불신과 거부로 나타난다. 급기야  흑인의사나 전문가 집단이나서고 흑인들이 집단면역을위해 동참할 것을 호소하지만 이미 사회 계층화에서 찢겨 나간 신분과 계급의 격차로인해 흑인이라고 해서 같은 흑인도 아니다. 흑인 대학의 교수와 총장이나서서 호소하지만 아직 길은 멀다. 유명한 신학자이자흑인 운동가인 노년의 제임스 (James Cone) 등장하고 흑인 사회학자인 코넬 웨스트(Cornel West) 매스 미디어에 나와서 말한들들을까? 흑인신학의 난제는 이미 미국에서 시민사회로 진입해온 들어온중산층 그룹의 흑인의마음을 잡지 못한다.  오히려 이들은 트럼프지지자들이 아닌가?

역사와 문화를 통해 침전되어온 습속을 끊임없이비판하고 책임적인 태도를가지고 해방을 향해 나가야한다고 주장한 사람은생활세계이론을 주장한 에드몬드훗설(Edmund Husserl)이지만, 이제야 비로서 그의 경고가 현실이 되어 나타나고 있다.

이것을 우리는 성서의세계에서 듣는다. 메타노이아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자. 잘못된 길에서 이제 중지하자. 그렇지 않으면 결과는 참담하다.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하늘과 땅을 향해 하나님의 혁명의 정치를 위해 겸허하게 서자. 시민사회는 메타노이아 하는 현장이다. 경제사회의 부르즈와지도 투표권은 번뿐이다.  그리고 이들이 살아가는토대 역시 상품을 사주고 소비하는 시민들에게있다. 부르즈와지 역시 시민사회에서 공공선과 정의 그리고 공생의 가치를 공감하면서 정치적주체로 거듭나야 한다. 

이것은 누구의 백신인가? 모두가 미국시민을 위한 것이라고 트럼프와 같은 시대착오적인 중상 주의자는 선동하지만, 이러한 행동을무식의 극치로 노암 촘스키(Noam Chomsky) 말한다. 물론 화려한 정치적 무대에서 무식의 극치는계산된 셈법을 가지고있을 것이다. 시민사회는 제헌적인 민주주의를말한다. 투명하고 정당한 법의 지배와 더불어 헌법이 국민을도덕적으로 만든다는 신념은알렉시스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 미국을 방문하고 프랑스의 민주주의와 비교하면서 그의 유명한 저서인미국에서 민주주의에서 나타난다. 다인종들이 모여 시민으로 정치주체화 민족개념은 가능해진다.  그러나 시민 사회와 헌법적 민주주의가 없이 인종을 근거로 국민적 열망을담을 경우 필연적으로 이것은 파시즘이나 제국주의로 수밖에 없다. 그래서 트럼프의중상주의는 콜럼부스  발견이후 16세기 라틴 아메리카를 침탈하고 이미 여기서 육백만 이상의 인디오들을 학살한스페인 식민정치에서 극에 달한다. 이런 역사적 범죄를 재현하려고 할까? 글로벌 제국의 쟁탈권때문이라고 버클리의 친구교수가귀뜸해 준다.

신체 정치학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물론 푸코는 이것을 보지못했다. 그러나 놀랍게도이것을 사람은국부론 아담 스미스이고자본론 마르크스이다.   이들은 엄청난 살해의 정치학을보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갔다. 푸코의 말을 들어보자.

푸코는 마르크스가 노동의 소외현실에서 노동자의신체가 거대한 생산과정의기계부품으로 전락하는 현상에서신체 정치학을 착안했다. 생산을 효율적으로하기위해 노동자의 신체는규율 되고 훈육되며 감시된다.  회사의 이익창출을 위해서기준에 맞지 않으면 해고가 이루어진다. 생산 자본주의 시스템안에서 노동자의 신체는 생산라인의부품으로 전락해서 통제당하고결국 폐기 처분된다.

이것이 흔히 산업자본주의 현실일까? 레닌은 사회주의를 전력화로 규정했고미국의 테일러 시스템을가장 부러워하지 않았나? 결국 사회주의는 국가자본주의에 불과했고 관료제로결단이 것이라는 막스 베버의 예언은 적중한 것으로 본다.  자본주의란 노동소외와 더불어노동자의 신체에 대한 규율과 축적 없이는 불가능하다. 자본축적은 신체의 축적 없이는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러한 신체의 축적을작업장에서 가능하게 하는 것은 국가의 권력이다. 푸코는 개인과국민의 , 신체, 생에 대한 국가 통치권력을 비오폴리틱으로 명명했다.   이제 국가는 국민의 산아 제한에까지 관여하고 국가정책에서인구론은 중요한 자리를갖는다. 인간의 성을 결정하는 것도 결국은 부르즈와지 시대의국가권력의 형식이 수가 있다. 그래서 성은 문화적 구성이라고까지 말을 하지 않나?

물론 푸코의 신체정치학에는 그의 담론에 대한 분석과 권력과 지식의연계라는 계보학적인 접근이있다. 백신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의학자들의전문연구가 있을 것이며, 이러한 과정에서전문가 들의 회의와 국가의 통제 그리고 사회제도권들에서 지지가 필요해진다. 백신에 대한 담론의 형성 과정과 실천 그리고 매스 미디어를 통한 유포와 더불어 이제 화이자나 모더나 백신은 바이러스를퇴치할 의학품으로 선전되고세계적인 보급망으로 상품화가 것이다.

과연 그럴까? 여기서 밀려나간 그룹들, 흑인을 대변하는전문가나 아시아인을 대표하는의학자들은 이러한 담론의형성과 실천 그리고 국가의 지지를 받는 거대한 지식과 권력의체계안에서 각자의 소리를내고 자리를 가지고 있는가? 지식과 권력의 체계는 담론형성을통해 사회를 지배하고 인간의 의식을 매스 미디어를 통해 각인시킨다.

지금 푸코는 의학기술과 의학의 전문성을 무시하지않는다.  이들의 담론과정과 실천영역에심의 민주주의가 작동되지 않으면 결국 아무리 좋은 화이자나 모더나 백신이라 하더라도 흑인 공동체 로부터 오는 불신의 장벽을 넘어서기가어려울 것이다. 이것은 지배담론의 부메랑현상이다. 

다른 측면에서 신체정치학을 가장 날카롭게 공격한 사람은 이탈리아의 저명한철학자인 지오르기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이다. 이탈리아에서 벌어지는 국가의신체통치지배방식에 그는 아연실색한다. 고대로마 시대에사용되던호모 사케르” (homo sacer) 용어를 차용한다. 코로나 사태를지배 통치하는 국가의 신체정치학이 흡사 뭇솔로니 시대의 파시즘을 연상케한다. 인간은 호모 사르케 벌거벗겨진 인간으로 전락했다. 전염지역에 군대가파견되고 구역이 통제되고벌거벗긴 죽어나간 사람들은 최소한 인간으로서의예의조차 얻지 못한 구덩이에 파묻혀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정치적 동물이라고 했나? 전혀 아니다. 오늘날 아리스토텔레스의정의는 국가 신체정치에 발가벗긴 몸이 사라져가는 존재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인간의 리얼한 모습이다. 신체정치학을 통해 신파시즘이 도처에서 출몰할수가 있다.

하버마스는 최근 프랑스 르몽드지와  팬데믹 상황에 대한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에서 하버마스는 코로나바이러스 시대에 국가의권력이 무제한적으로 사용되어서는안된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기생한 신자유주의 돈벌이꾼들이정치인들과 결탁해서 자신들의이득을 추구할 , 글로벌 자본주의는파국을 맞이할 수가 있다. 물론 우리는 후기 자본주의가 갖는 정당성을 무시할 수가 없다. 국가의 역할을 단지 경제적인 논리로 파악하려는마르크스주의자 들이나 신자유주의자들에게는일종의 공감대가 존재한다. 그러나 하버마스의의견은 지점에서 극명하게 갈린다. 국가는 시민주권을 통해 소통되고 승인되어야 한다. 시민사회는 생활세계를침탈해 들어오는 신체정치권력이나신자유주의 경제논리 그리고매스 미디어의 현란한 시뮬라시옹으로부터 방어되어야 한다.

 하버마스의 우려는 미국에서현실로 나타난다. 현대판 중상주의를 꿈꾸던트럼프나 신자유주의와 은밀하게결탁된 민주당의 관료주의자들사이에서 코로나 바이러스는너무도 좋은 정치적 호재이다. 매스미디어는 바이러스를 기회로 트럼프의부정선거 전략을 내리치면서이제 대선은 민주당의 승리로 가닥이 잡히고있다.

미국내의 사회주의?  지난한 이야기다. 생활세계를 지켜내기도 벅차다. 비오폴리틱 시대에 의료 전문가들, 경영인들, 국가 관료들로 모인 위원회에서 생산되는 백신에 대한 담론은 무엇일까? “백신담론 국가의 신체정치가 개입한다. 흑인, 아시아 인종들의 인권은 찾아보기가어렵다. 공짜로 주면 군소리없이 받아먹고, 이제 터널의 끝이 보이고 빛이 보인다 매스 미디어의 시뮬라시옹에서 필자처럼뉴스를 보는 사람의 의식은 완전히 식민지화가되고 체제에 의해 침탈당한다.

이것을 루카치는 물화현상으로불렀다. 마르크스가 자본론1에서 말한 상품의 물신숭배를 베버의 합리화과정에서 나타나는문화 사회적 영역전체에서 일어나는 인간의식의 굴절과부서짐을 언급한 말이다. 이러한 물화가지배하는 현실에서 노동자들의의식에 혁명을 호소 한다는 것부터가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가 없다. 아무도 자유롭지 못하다. 베버가 개신교 윤리에서자본주의 정신의 결론부에서니체적인 허무주의적 음조로쇠우리창살에서 우리는 벗어나지 못한다고 말한 것과 맥을 같이한다.

백신접종 거부운동공동체적인 삶을 무시한 처사로 앵커들이 앞다투어비판을 한다.  이들은 메스 미디어의 헐리우드 인기 배우정도 이상으로 시민사회의 여론을 장악하고있는정치꾼들이다.  과연 이들의 비판이 맞는가? 이들은 길거리에나와서 우리가 국민이다. 국민적 승인이없는 백신은 의미가 없다는 불신의 소리를겸허하게 들어야하지 않나? 옆집에 사는 흑인친구에게 물었다. 백신접종을 거냐? 한다고 한다. 질병과 백신에 대한 아픈 역사는 친구의 영혼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나는 할말이 없다.

국가의 파시즘 성격은시민사회의 안전망이 아니라백신을 만들어낸 회사들에게상상치 못할 특혜를 주는 데서 드러난다.  바이든 정권이후 파이저나모더나 백신을 접종한 신체적인 피해나 희생당한 사람들은 최소한법적 권리도 보호받지 못한다. 시민사회와 연대하는변호사는 미국의 백신 접종 역사 이래 이토록 엄청난 백신회사에특권과 혜택을 사례가 있는 따져 묻는다. 국가는 헌법을 넘어서는시민의 신체에 대해 함부로 수가 없다. 시민사회로부터 국가를 상대로  법 소송이 일어날 기세가 보인다.  민주당이 정권을 잡으면 대한민국의미래에 도움이 된다고말하는 지인도 있지만꿈같은 소리로 들린다. 우리는 얼마나미국의 일그러진 얼굴을알고 있나? 바이든 정권이후 유엔을근거로 신자유주의와 신체정치학이 결합된 무서운형태의 지배학이 등장할것이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은 이러한 글로벌 지배방식에서얼마나 피해갈 수가 있을까?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이득을 보는 자는 남의 컴퓨터 프로그램 헐값에 부풀려 장사를해먹는 게이츠와 같은 자들일 것이다. 그는 요즘 느닷없이 인류의 건강을자기만이 지킬 것처럼 CNN 나와 인터뷰를 한다. 마치 마음씨 좋은 아저씨처럼, 그런가하면 종교인과 같은 고뇌하는 인상을 지으면서 바이러스를자기가 책임진다고 한다. 그에게 인류의공중보건을 책임지라고 누가 허락했나?  그의 인류의 건강과 세계의 평화를 대변하는허튼 논리는 무섭다. 그냥 바이러스 백신 장사하면 국가로 엄청난 혜택과특혜를 얻는다고 말하면누가 욕이나 할까? 시민들이 바보인가? 대변하는 논리(representation)  문화적인 헤게모니를 말한다.

포스트콜로니얼 이론의 아버지로여겨지는 에드워드 사이드는오리엔탈리즘”(Orientalism)이라는 그의 주저에서 서구가 동양사회를 위해 대변하는 헤게모니 논리에평생 비판과 투쟁을 하다가 죽었다. 왜냐하면 대변하는 엘리트주의자들은식민주의자들의 후예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여전히이전 식민주의를 경험한 사회에서도 여전히 문화 정치 엘리트들에게 그대로 나타난다.  헬무트 골비처 역시 그의자본주의 혁명에서 이러한 그룹을 신식민주의 첨병으로 통렬하게 비판한다. 시민사회에서 심의 민주주의를 추구하거나 아니면 하나님의 은혜를사모하는 사람들은 권력 엘리트들과는 다르게 살아야하지 않나?

언제쯤이면 국가의 관리들과전문가들은 시민사회의 소리를경청할까?  공론장에서 자유롭게 이성적인토론을 통해 국민적인 승인과 민주주의의 자율적인성숙을 통해 백신접종이 가능해지는 날이 언제쯤 올까? 공중보건은 심의 민주주의적으로 그리고 사회 안전망에서 밀려나간 하위 계급의 사람들과의 연대를 통해 방어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버마스 이전에 루소의절규이기도 하다.

신학에서 이러한 루소의시민사회론에 올인한 사람은 바르트이다. 그의 신학은 대단히 독특하다. 부활의 그리스도가 교회와 역사안에서살아계신다. 그러나 부활의 그리스도는 사회 안에서 벌거벗긴 살고 있는 암하레츠와 연대한다. 교회는 이것을 봐야한다. 부활의 그리스도의 예언자적인투쟁에 가담하는 것이 교회가 추구해야하는 화해의정치이다.

누가 시민사회를 지키며 살아가나? 바르트는 단연코 말한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생명의주님으로 고백하는 교회공동체이고, 목회자는 공공지성인으로 책임의 소명을 가지고 있다. 그럴까? 교회는 노아의 방주가아니라 시민사회안에 존재하기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의혁명에 싸인을 새언약의 일꾼들이라면  최소한 사실 만큼은 잊지 말았으면 한다. 개혁교회의 급진적인유산과 전통에서 토라는복음의 필요한 형식이되기 때문이다. 

바울의 십자가 신학은그리스도의 벌거벗김을 저주로표현한다.  죄를 통한 저주,  문명의 탐욕과 승자들의지배논리에 십자가 신학은아니오라고 말한다. 다시 오실 메시야는 순전한 희생자의 삶에 같이하지  자연과학기술의 진보를 통한 미래에 대한 장미빛 환상을 주는 분이 아니다.   지나간 과거의 추함과폭력을 드러내는 것이 심판의 천사의 역할이다. 이것은 벤야민이말하는 아남네시스(희생자에 대한 회상) 합리성이다 .

그렇다. 회상은 과거로의 복귀가 아니라생생한 현재(vivid present) 들어옴이다. 팬데믹으로 인해 죽어가는 것도 억울하다. 그러나 국가의폭력 앞에서 무참히 알몸으로 벗겨져 나가고구덩이에 파묻히는 사람들과교회는 연대하도록 부름 받았다.   이것은 교회가 준수해야하는아남네시스의 정치이고, 이러한 제자직이 없이는우리는 성만찬에 오시는그리스도의 몸과 보혈을 받아먹을  수가 없다. 아남네시스적인 십자가 신학이부활의 그리스도를 만나는좁은 길이다.

누가 시민사회를 지키고 살아가나? 적어도 기장의 공동체에서 은혜란시류에 편승하는 것이 아니라 물살을 거슬러올라가는 것이 아닐까? 지배 엘리트주의와 생활세계의 식민주의화에 아니오를하면서 살아야하지 않을까? 우리 기독교장로교 공동체는 이런 좁은 길로 묵묵히 갔으면 한다.

   



박상필(인천노회,용광교회,목사) 2020-12-29 (화) 17:25 3년전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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