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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신학의 출발점과 전망 - 정의와 도덕

임창세 (서울노회,용산제일교회,목사) 2020-12-05 (토) 18:50 3년전 1269  
  2._공공신학의_출발_과_전망-_도덕과_정의.hwp (118.5K), Down : 21, 2020-12-05 19:41:33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의 출발점과 전망

- 도덕과 정의 -

 

임창세 박사(칼바르트센터 국내소장)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이 사회과학적 토대로 삼았던 사회주의사상은 인간과 사회를 이해할 때 도덕적 요소와 그 중요성에 대해서 엄밀하게 검토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두 사상은 인간과 사회를 분석할 때 철저하게 아래로부터의 방법론(bottom-up)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즉 유물론적인 인과관계만을 그 인식론적 틀로 삼았고, 그로 인해 인간 삶에 중요한 요소인 도덕과 정의의 문제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결과 사회주의국가에서 심각한 도덕적 해이와 부정부패가 만연했고, 그것이 사회주의 붕괴의 주요한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다. 사회주의체제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느낀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를 제안한다. 페레스트로이카란 재건 혹은 재편이라는 뜻을 가진 러시아어이며 스핑크스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에서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의로의 전환을 표방했다. , 도덕과 정의를 무시한 레닌-스탈린주의에서 벗어나 본래의 사회주의, 즉 마르크스주의를 재검토하여 발전된 사회주의로 나아가자는 이데올로기적 운동을 전개한 것이다. 특히 사회주의 시스템에서 도덕성 회복의 중요성을 깨달은 페레스트로이카는 러시아 정교회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기존의 레닌- 스탈린적 사회주의와 종교적 사상은 쉽게 융합될 수 없었다. 오히려 종교적 자유를 강조한 결과, 이슬람과 불교의 전통을 갖고 있던 소수민족의 민족종교를 되살려 놓았고, 그것이 민족주의의 부활을 촉진시켰으며 이로 인해 소비에트연방을 붕괴를 초래하는 주요한 빌미를 제공했다.

 

막스 베버(Max Weber)는 이런 사회주의 이데올로기의 문제점을 미리 내다보았다. 베버는 인간사회를 분석할 때 아래로 부터의 방법(Bottom-Up Method)’과 함께 위로부터의 방법(Top-Down Method)’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베버는 사회역사적 현상에 대해 종합적으로 분석하는 자신의 방법을 현실과학 혹은 현실탐구과학이라고 정의하고 유물론적 경제적 토대를 근거로 사회역사적 실제를 파악하는 마르크스주의 방법을 법칙과학이라고 규정한다.

이 두 사회과학의 거장은 자본주의를 주요한 인식대상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그러나 다른 한편 베버와 마르크스는 그 접근 방법에서 근본적인 차이점이 있다. 먼저 베버는 다양한 자본주의와 ? 예컨대 농업자본주의, 상업자본주의, 약탈자본주의, 전쟁자본주의등과 ? 그 구조적 특성이나 역사적 형성 조건 및 발달 과정에 관심을 가진다. 이 모든 유형의 자본주의는 나름의 구조원리와 발전논리 그리고 합리성과 문화의의를 갖는 역사적 개체이다. 근대 자본주의, 즉 시민계층적 자본주의도 다양한 역사적 개체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이에 반해 마르크스의 궁극적 관심은 자본주의 본질을 통해 근대사회의 경제적 운동법칙을 밝혀내는 것이었다. 이 운동법칙은 마르크스에 따르면 일종의 자연법칙이요 자연사적 과정이다. 즉 자연과학적 보편성을 가진다. 다시 말해서 베버는 자본주의 현실과학을 추구한 반면,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법칙과학을 지향한다. 따라서 마르크스가 파악한 자본주의의 모순은 일면적일 수 밖에 없었고, 이 단편적 모순을 지양하는 사회주의적 방법은 처음부터 한계와 문제점을 갖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공공신학은 마르크스의 방법은 진지하게 숙고하면서 막스베버의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수용한다. 하지만 공공신학은 막스베버의 방법론에 얽매이지 않는다. 베버 이후 다양한 사회과학이 등장했으며, 공공신학은 그 다양한 방법론을 사회와 인간이해를 위한 도구들로 포괄적으로 수용한다. 그와 함께 공공신학의 주요관심은 위로부터의 방법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특히 사회적 토대와 합리성을 위해 가장 중요한 도덕과 정의에 대한 논의는 공공신학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정의와 도덕의 문제

 

최근에 마이클 샌덜(Michael Sandel)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고, 그의 강의는 한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강좌 중 하나였다. 왜 한국에서 최근 정의문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급증하였을까? 그것은 전세계적으로 확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 문제와 긴밀하게 관련되어 있다. 사회주의가 몰락한 이후, 자본주의 이데올로기를 위한 브레이크가 파열되어 버렸다. 세계적으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확산되고 한국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한국에서는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와 함께 가진 자의 갑질문화에 대한 비판여론이 높아졌다. 이 시점에 사람들이 정의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마이클 샌덜의 정의론은 정의의 문제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키는데 공헌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하는데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정승훈 박사는 그의 책 공공신학과 학제 간의 소통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을 따르는 마이클 샌덜의 정의론 보다는 존 롤스(John Lawls 1921~2002)의 정의에 대한 이론이 옳으며 공공신학과 더 많은 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존 롤스는 1921년 미국 볼티모어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 전염병으로 두 동생을 잃는 아픔을 겪었으며 미국의 대공황 속에서 극빈의 삶을 경험했고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서 전쟁의 비참함과 인간의 비극을 체험했다. 이런 삶의 경험과 정의의 문제를 깊이 연구한 그의 학문적 여정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을 것이다. 그는 1950년 프린스턴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코넬대학과 MIT공대 교수를 거쳐 1962년 하바드대학교 교수가 되었다. 그의 주된 연구주제는 정의문제였다. 1958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논문을 발표한 이후, 정의에 관한 여러 논문들과 저서를 발표하였고, 1971정의론을 발표함으로써 그의 연구의 큰 결실을 맺는다. 그가 공정으로서의 정의라는 논문을 발표할 당시만 해도 윤리학은 학문으로서의 위상을 의심받고 있었다. , 논리실증주의가 학문적 패러다임을 지배하면서 귀납적 증명이 가능하지 않은 학문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분위기였다. 논리실중주의자들에게 도덕과 윤리 그리고 정의 문제는 주관적 가치판단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검증가능한 주제들이 아니었다. 그러나 롤즈의 정의에 대한 꾸준한 연구와 제안은 윤리학을 사회정의를 위해 필요한 학문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의 정의론은 학문적인 기여 뿐만아니라 현실정치에도 반영되었다. 빌 클린턴이 대통령으로 재임했을 때, 그는 존 롤스와 정기인 식사모임을 가졌으며 롤스의 이론을 현실정치와 민주당의 정책에 반영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존 롤스의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

 

존 롤스의 주저인 정의론에서 우선 공리주의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알다시피 공리주의의 모토는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다. 즉 다수가 행복한 기준으로 도덕과 정의의 기준을 삼으면, 그 사회는 정의롭고 도덕적이며 문제를 최소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공리주의의 문제점은 소수의 행복, 특히 다수에서 밀려난 빈곤층과 소외계층의 행복이 무시된다는 것이다. 소수의 행복을 보장하면서도 다수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그런 도덕과 정의의 기준은 없을까? 존롤스는 공리주의의 대안으로 의무론에 입각한 무지의 베일(Veil of Ignorance)”이라는 개념을 제안한다.

무지의 베일이란 모든 것들을 원초적인 상태로 돌려놓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현재 빈부격차가 심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태어나는 것 자체가 모험이고 도박이다. 어떤 사람은 흑인의 슬럼가에 있는 극빈층의 가정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비버리 힐즈의 부자집에서 태어날 수 있다. 이런 상황이면 인생의 출발점 자체가 불공평하다. 출발점이 불공정하면 경쟁 자체가 불공평하고, 따라서 그런 사회는 정의롭지 못하다. 즉 태어날 때부터 자유와 기회가 불공정하게 분배되어 있다.

따라서 공정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구성원들이 모두 태어나기 전의 상태, 어떤 가정에서 태어날지 모르는 상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이것이 무지의 베일이다. 아무것도 전제되어 있지 않은 백지의 상태에서, 즉 원초적 입장에서 어떻게 해야 모든 사람에게 공정한 자유와 기회를 제공할 수 있는지 공공장에서 합리적 토론을 거쳐 합의점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존 롤스는 이런 토론을 위한 다음과 같은 정의의 두 가지 원칙을 제안한다.

첫째, 각자는 다른 사람의 유사한 자유의 체계와 양립할 수 있는 평등한 기본적인 자유의 가장 광범위한 체계에 대해 평등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

둘째,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a) 모든 사람에게 이득이 될 것이라고 합당하게 기대할 수 있도록, 그리고 b) 모든 사람에게 개방된 지위와 직책에 귀속될 수 있도록 배정되어야 한다.

 

좀더 구체적인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정의의 제1원칙에 의해 요구되는 평등한 기본적인 자유로는 정치적 자유, 언론의 자유, 결사의 자유, 양심의 자유, 사상의 자유, 인신의 자유, 사유재산을 소유할 권리, 그리고 임의적인 체포와 구금으로부터의 자유 등이 있다.

그리고 정의의 제2 원칙은 소득과 부의 분배, 권한과 책임에 따라 차이 날 수 밖에 없는 조직을 고안하는데 적용된다. 부와 소득이 모두에게 균등하게 분배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분배는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동시에 어떤 권한과 책임을 갖게 되는 직위는 누구나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비로소 모든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이 편성된다.

 

필자가 보기에 존롤스의 정의론은 많은 신학적 담론을 함축하고 있다. 무엇보다 존로스가 제안한 무지의 베일이라는 개념은 성경의 희년사상과 많이 닮아 있다. 무지의 베일은 모든 사람이 소유 이전의 원초적 상태로 돌아가서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희년 역시 50년마다 모든 소유가 본래의 상태로 돌아간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개인소유나 부의 축적을 금지한 것은 아니다. 레위기 25장에서 부자와 가난한 자에 대한 언급은 하나님께서도 빈부격차를 어느정도 허락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성내에 있는 가옥은 1년이 지나면 영구히 개인소유가 될 수 있었다.(25:29ff) 또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행위는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만 금지되었던 반면, 외국인에게는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아서 부를 축적하는 일이 허용되었다. 그리고 고용주와 임노동자의 관계도 인정하면서도 임노동자의 인권보장을 위해 노력할 것을 당부하셨다. 하지만 인간 삶의 가장 기본적인 토지의 소유 만큼은 철저하게 기본생존권이 보장되었다. 근본적으로 토지의 개인소유는 금지되었다. 모든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다.(25:23) 단지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점유권만을 인정하셨다. 그리고 희년이 되면 예외없이 본래의 토지소유자에게 돌아가야만 했다.(25:28)

따라서 성경의 희년사상은 개인의 소유를 인정하고 부의 축적이 허용되지만 가장 기본적인 인간삶의 토대인 토지의 분배만큼은 엄격한 공정성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존롤스 정의론의 뿌리

: 칸트의 정언명령(Kategorische Imperativ)과 신존재의 요청

 

존 롤스의 정의론은 임마누엘 칸트의 의무론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의무론은 행위의 의지나 동기를 중시하고 결과보다는 주어진 원칙을 따를 것을 강조한다. 칸트의 도덕적 이상은 인간의 순수 이성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칸트는 그 자체가 가치를 지니고 있어 무조건적으로 마땅히 해야 할 정언명령에 의해 보편적 법칙에 부합하게 행동하라를 제시했다. 하지만 칸트는 보편적 법칙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롤스는 그 법칙의 내용을 채워보려고 시도했다. 처음으로 사회를 구성하기 위해 모인 원시적 인간들이 자신의 능력과 결함들을 전혀 모르는 무지의 베일뒤에서 어떤 정책과 제도를 자발적으로 선택했을까를 상상해 보았다. 그 가상에서 롤스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성공의 욕심보다는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더 강하기 때문에 모두가 위험을 피하고자 소위 최약자-최혜분배원리에 동의할 것이라고 보았다.

존롤스가 주장하는 이러한 정의의 원칙은 칸트가 주장한 정언명령과 유사하다. 그리고 존롤스가 주장하는 원초적 입장은 칸트가 말하는 자율성과 정언명령을 경험적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홍성우 지음, 존롤즈 정의론 읽기, 세창미디어 2015, pp 140-142).

존롤스의 정의론이 칸트의 도덕철학에 기반을 두고 있다면 공공신학과의 대화는 더욱 폭넓게 이루질 수 있다. 왜냐하면 칸트의 도덕철학은 분명한 신학적 동기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칸트의 주요저서는 다음의 세 개의 비판서이다: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그리고 판단력비판. 첫 번째 작품이자 가장 중요한 비판서인 순수이성비판의 후반부에서 칸트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자연신학에 대한 비판, 특히 신존재증명에 대한 비판을 위해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비록 인간의 이성에 신에 대해서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인간의 이성으로 신존재를 어느정도 추론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서 이 세상이 존재하려면 제일 원인이 있어야 한다. 그 제일 원인이 하나님 이외의 다른 존재라고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또 이 우주는 운동하고 변화하고 있다, 그 변화와 운동의 제일 운동인이 존재해야만 한다. 이 제일 운동인 역시 하나님 이외의 다른 존재는 상상할 수 없다. 따라서 신은 존재한다.

칸트는 묻는다. 이런 인과론적 추론에 의한 신존재증명은 과연 타당한 것인가? , 인간의 이성과 오성을 통한 신존재에 대한 추론은 과연 정당한 것인가? 칸트에 따르면 인과론적 추론으로 신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이성과 오성의 인식능력을 너무 과신하는 것이다. 인간의 이성과 오성안에서는 인식오류가 빈번히 발생한다. 따라서 이런 불완전한 것은 신존재증명으로 도구로 사용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인간의 이성과 오성은 모든 사물과 운동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인식하려는 경향이 있다. 우리에게 관찰되는 세계는 과연 관찰되는 그 모습으로 진짜 존재하고 있는가? 우리가 보는 색깔이나 모양 그리고 운동성은 과연 있는 그 자체로 사실일까? , 인식론적인 사실이 존재론적 사실과 일치할까? 칸트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 칸트에 따르면 사물과 인식의 기본적인 두 가지 틀인 시간과 공간 조차도 사람에 따라 다양하게 인식된다. 같은 한 시간도 때에 따라 짧게 느껴지기도 하고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같은 공간도 크게 보일 때가 있고 작게 보일 때가 있다. 더욱이 사람의 주관에 따라서 같은 사물과 사건이 헤아릴 수 없이 다양하게 해석된다. 따라서 이렇게 가변적이고 주관적 해석이 강한 이성과 오성을 이용해서 증명되는 신존재는 보편타당성이나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칸트는 이런 인식의 주관성은 인식의 가장 중요한 부분인 오성(Vertand)이 범주적(kategorisch)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즉 오성 안에는 시간과 공간, 질과 양 그리고 색깔, 원인과 결과 등과 같은 범주틀이 내재해 있어, 그 범주틀을 통해서만 사물과 존재를 인식하기 때문에 사물 자체(Ding an sich)의 객관적인 모습을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결론내린다. 따라서 토마스 아퀴나스가 주장하는 신존재증명은 객관성이 결여되어 있다. 즉 이성과 오성을 통한 신존재증명은 타당하지 않다.

 

그렇다면 칸트는 인간이 신존재를 부정하거나 인간이 인식할 수 없다고 주장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칸트는 인간의 내면 안에 보편적으로 내재한 도덕성과 자율을 통해서 신존재에 접근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칸트는 자신의 두 번째 비판서인 실천이성비판에서 인간 내면 안에 도덕률이 선험적으로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마치 모든 인간에게 명령처럼 선험적으로 주어져 있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등과 같은 도덕적 명령은 공간과 시간을 넘어서서 모든 인간들에게 보편적으로 지켜져야 할 명령처럼 이미 존재한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 도덕적 명령을 크게 가언명령(Hypothetische Imperativ)과 정언명령(Kategorische Imperativ)으로 구분한다. 가언명령이란 조건부가 전제된 명령이다. “행복한 삶을 살려면 화내지 말아야 한다.” 혹은 성공하려면 열심히 일해야 한다.” 등과 같이 조건을 수용하는 사람에게 타당한 도덕성으로 수용되는 명령을 말한다. 그리고 또 다른 도덕적 명령은 정언명령이다. 이 명령은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할 보편적 명령이다.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 등과 같이 인간이면 행복을 위해서 누구나 조건없이 지켜야할 명령을 말한다. 칸트는 특별히 이 정언명령의 선험성에 대해서 강조한다. 즉 이 정언명령은 인간에게 후천적으로 교육을 통해서 익혀지거나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수용된 것이 아니다. , 선험적 명령이라는 것이다. 이 선험적 명령을 자율적으로 따를 때 인간에게 기본적인 행복이 보장되고 사회의 기초적인 정의가 실현될 수 있다.

 

칸트가 인간의 내면 안에 선험적 정언명령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칼빈의 주장과 유사하다. 칼빈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영혼 안에 자연법을 넣어 주셨다고 말한다. 기독교강요 마지막에 국가의 법에 관한 문제를 다루면서 모든 다양한 도덕법들은 하나님께서 인간영혼에 불어 넣으신 양심의 법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도덕법이라 부르는 이 하나님의 법도, 자연법에 대한 증언이요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의 마음에 새겨놓으신 양심에 대한 증언 이상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기독교강요. 20.16)

칸트는 이성적 사고를 최고의 것으로 생각했던 시대의 상황에 맞추어 신앙 역시 이성종교를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 18세기와 19세기에는 모든 신앙적 요소를 이성적 철학적 언어로 풀어내려는 노력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경건주의 신앙에 강한 영향을 받은 칸트는 칼빈이 말한 이 자연법, 즉 하나님이 새겨놓으신 양심의 법을 철학적 언어로 바꾸어 정언명령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고 있다.

비록 인간의 내면에 양심의 법, 즉 정언명령이 있더라도, 이것이 인간에게 최고선을 향해 가도록 동기를 부여하지는 못한다. 인간내면 안에 내재한 자율성이 어느 정도 정언명령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도덕적 삶의 동기를 부여할 수는 있지만 최고선으로 나아가게 하지는 못한다. 따라서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의 결론부에서 인간의 도덕성이 최고선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요청된다고 말한다. 바로 영혼불멸과 신의 존재가 요청된다는 것이다.

칸트는 이러한 요청들을 진리라고 주장한다. 불멸하는 영혼과 신은 이론적인 차원에서는 진리라고 판단할 수 있다. 이것은 초험적인 문제이다. 하지만 실천적인 차원에서는 진리이다. 그리고 칸트에 따르면 불멸하는 영혼과 신의 존재는 가능한 직관을 통해서는 증명될 수 없지만 도덕법칙의 현실성에 의해서 증명된다.

 

영혼불멸과 신존재의 요청을 주장하는 칸트의 도덕적 실천철학은 당연히 신학과의 많은 접촉점을 갖는다. 19,20 세기의 많은 신학자들은 칸트철학과 접목하고 수용하여 자신의 신학을 발전시켰다. 공공신학 역시 이런 칸트철학의 도덕이론을 적극 수용한다. 특히 정승훈 박사는 칸트의 도덕이론이 계몽주의 시대에 공공성과 도덕의 보편성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다고 말한다. 정박사는 그의 저서 공공신학과 학제간의 대화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칸트의 도덕적 의무론은 계몽주의를 논의할 때, ‘이성의 공공사용이 핵심이 된다. 공공의 영역에서 인간의 이성은 제한과 외적인 강요에 제한되거나 굴절 되어선 안된다. 오직 이성만이 도덕성의 최고 원리이며 도덕의 보편성에 확고한 토대를 놓는다.”

 

칸트 도덕철학의 뿌리 : 경건주의

 

칸트는 왜 최고선을 위해서 영혼불멸과 신존재의 요청을 주장했을까? 금세기 칸트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존 롤스에 따르면 신앙적 실천동기 때문이다. 롤스는 칸트의 도덕철학을 이해하려면 다음의 세 가지 논제를 필히 검토해야 한다.

: 도덕법칙, 이성의 사실 그리고 실천적 신앙. (존롤스,


박상필(인천노회,용광교회,목사) 2020-12-10 (목) 11:16 3년전
기대가 큼니다.
다시금 일어납시다.
적극 지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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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창세(서울노회,용산제일교회,목사) 2020-12-12 (토) 15:37 3년전
박목사님 감사합니다
관심가져주시고 기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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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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