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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홍해는 갈라진다.

신흥식 (충남노회,평지,목사) 2020-10-04 (일) 18:47 3년전 1888  

 

             검찰 사무직 공채 시험에 합격 : 무학지인 無學之人

 

동부전선  서화 瑞和 라는 데서 더 들어가 민통선 에서  3년 군대를 마치고 제대한 것이 1976.  9. 18 일이고.

검찰사무직 공채 시험을 보던 날은  1976. 11. 28 이었으니까  제대하고 두 달 쯤 됐을 때였다.

 

한달 후에 ,그 시험 합격자 명단에 내 이름이 있는 신문 발표를 보고는 한동안 멍멍 하였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다. 

 

무학 無學  인 주제에 국가 공무원 시험을 응시하게 된 동기는  학력제한 규정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 전까지는 공무원 시험에    " 고졸 "   이상이라는 학력 제한 이 있었다.

 

 군대를 마치고 나와 보니 , 그 제한 규정이 폐지됐네.   어떻게 해서 철폐됐는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를 살게 하시려고 아마도 그 렇게 하신 줄로 생각이 된다.

 

제대하고 한달 동안에 다섯 과목 시험 준비를 다 했다.   집에서 혼자 한다.

어디 도서관에 간 것도 아니고, 누구를 만난 것도 아니고, 새벽 4시에 일어나서 밤 12시 까지 꼼짝 하지

않고 , 책상에 앉아서 시험자료 일독을 마치고 났는데,

 

 법무부에서 사정이 생겼다고 시험을 한달 연기 하였다.

 그렇게 연기 되는걸 보고 나는 아,  이건 나를 위해서 이렇게 하시는 구나  !  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합격도 걱정할 일이 아니라는 감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 다음 부터는 여유가 생겨서, 다시 입대 전에 하던 신문 배달을 하러 나간다.

새벽에 나가서 신문 배달을 하고 집에 와서 다시 모자라는 부분을 더 보완하고,

 

특별히 영어 시험에 신경을 써서 안현필의 " 본오력일체 " 를 안 선생님께서 하라는 대로 반복 또  

반복 한다.    흰쾨끼리는 어른의 말씀을 잘 듣는 버릇이 있어서,

 

시험을 보던 날도 주일 날이었는데, 새벽에 나가서 신문을 다 돌리고,  그 때 신문돌리던  무교동

북창동 소공동 을지로 입구 를 다 뛰어 다니며 마치고 나서 ,  곧바로 시험장으로 간다.

 

수험장으로 갈 시간이 급하여 세수를 할 겨를도 없이 신문 배달하던 모습 그대로  청량리 역을 지나

경희대학교로 가보니 벌써  수험생들은 다 모여 있고, 그 가운데 나만 흉칙한 모습으로 서 있으 려니,

 참 난감하였다.

 

그러나 저러나, 시험지를 받아 보니 , 이게 웬 일이냐. 다 아는 것만 나왓네.

아니, 이럴 수가 있나.  시험이 이렇게 쉽다면야 이건 뭐 잘못 된 거 같은데, 

아니 검찰 사무직 시험이라는 게 이럴 수가 있나.

 

  두 말 할 거 없이 다 쓰고 교문을 나서는데

어디선가 소리가 들린다. 너 오늘 합격 하였느니라.  

 

그렇더라도 합격자 발표가 나오기 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아니한다.

어머니도 모르고,   하나님과 나만 아는 일이다.

 

그 후에 발령나는 걸 보고 나는 다시 감격하지 않을 수가 없었네요.

전국에서 200 명을 뽑았는데, 흰쾨끼리를 제일 먼저 발령 내 주시는 거 있죠. 

 

 서울 고등검찰청 으로 오라는 전보를 받고 가보니 그게 임용 任用 이었습니다.

 

신문 배달하던 놈이 무슨 빽이 있나, 돈이 있나 ,  어디 법무부에 누구 아는 사람이라도 있나. 

무학에다가 아무 것도 없는 주제에  이게 웬 일이냐.

 

나는 이 나라에서 흙수저 에도 끼지 못한다.

학력이 최고로 중시되는 사회에서 , 무학자가  무슨 사람 노릇을 할 뻔도 못했다.

 

중학교에 다니던 친구들이 길에서 나를 보면 외면하고 무시하던 건 당연한 거고요,

일가 친척들 조차도 사람으로 알아 주지를 않는 세상이었던 걸 .

  

 

             청휘빌딩  수위 守衛 는 세상에서 제일 높은 사람,

 

내무부에서 일년에 한 번씩 전국의 토지 값을 결정하여 발표하는 일을 한다.

해마다 전국에서 제일 비싼 땅은 명동에 있는  상업은행 명동지점 자리였다.

1970 년대에 그렇게 햇다. ,  그 건물 이름이 청휘 빌딩 이다.

 

한국에서 뭐 좀 한다는 기업들은 거의 다 거기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다.

우리나라 민주화에 한 계기를 만들었던  YH 무역도 거기 에 있었다.

 

오전에는 한국일보를 옥인동 루상동 신교동 효자동 궁정동 청운동 쪽으로 돌리고, 석간으로 서울경제신문을

소공동으로 명동으로 을지로  퇴계로  남산 까지 돌린다.   마라톤 선수들이 훈련하는 거 보다 더 많이 달린다

 

신문 보급소에서 자고 , 라면으로 만  살면서 그렇게 뛰어 다녔다.

그러고 다니면서도 왜 그렇게 기뻤던지 , 어쩌면  세상이 그렇게도  좋았었는지 모른다.

 

지금와서 보니 슬퍼하지 않게 하시려고 성령께서 그렇게 하셧던 거지요.

 

 그 때에는 시민회관이라고 했는데, 지금 세종문화회관 뒷골목 종교교회가 있는 도렴동에

 대성학원으로 부터 대입 학원이 거기에 다 있어서 거기를 학원골목이라고 불렀다.

 

거기에  한국일보 효자 보급소가 있었다. 거기서 부터 신문을 안고 거리를 달려 다니면

 저녁 어두워 져야 끝난다. 마치고 오다가  금요일이면 흥사단에서 하는 금요개척자 강좌를 듣는다  .

 

나라가 망하고 희망이 없어진 시절에 민족에게 비젼을 살려 주려고 희생하신  도산선생 안창호 제자들,

 

.그 때 을지로 입구에 향린교회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그 앞으로 다니면서도 배달하느라고 잘 알아보지 못했다.

 

흥사단  강사님들의 강연을 잘 듣는다.  민주수호 청년협의회 이재오 李在五 도 거기서 자주 본다.

자주 뵙는 강사 로는  김동길 金東吉 안병욱 安秉煜  함석헌 咸錫憲  이고, 이슈에 따라 전문가들이 오신다.

 

명동 사거리에 있는 그 청휘빌딩에는 경비실에 근무자들이 서너명이 있다.

신문을 무겁게 안고 엘리베이터에 들어가면, 그 중에 한 사람이 쫓아 와서 신문을 안고 있는 채로 끌어 낸다.

 

경찰서 에서 뭐 좀 하는 거 같이 , 중죄인을  잡아 가는 거 처럼 사람을 강제로 끌어 낸다.

지금 생각하여 보면 그 사람의 시커멓고 험상궂은 모습은 아마도 저승사자 가 아니었던가 싶다.

 

이제는 다 잊은 일이고, 지나간 일들이다.

 아무 말도 못하고 신문을 안은 채로 끌려 나가던 놈을, 이렇게 고등검찰청 직원으로 보내 주신다니.

 

세상에,  지금도 홍해 紅海 는 갈라지느니라.

감사 무지로소이다.

 

 

                      시험을 보면 合格 합격하는  은사

 

 고린도 전서 12 장에는 아홉가지 성령의 은사 恩賜가 열거되어져 나온다.

거기에 없는 은사도 더 있다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된다.    시험을 보면 합격하는 은사 恩賜 .

 

검찰에 발령을 받고 3 년 정도는 구름위를 나는 거 같은 기분으로 다녔다.

덕수궁 돌담 길에서 안으로 돌면 정동으로 가는 곳에 법원과 검찰청 건물이 한 울타리 안에 같이 있었다.

지금 서초동으로 나오기 전 에,

 

승진이며, 더 좋은 사법시험이며, 이런 것을 보려고 마음 먹고 있었고, 다른 생각은 없었던 때였다.

어느 날 일을 마치고 관보 官報 를 보던 중이었는데,  그 관보 맨 끝장에  검정고시 공고 가 나와 있어서 잠시

보는 순간,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너 그것 좀 한 번 보려므나.   그 세미한 음성,

그 강렬한 마음에 호소를 막을 수 없어서 그 다음 날 서울시 교육위원회를 찾아가서 고입 高入 검정고시

원서를 낸다.  사무실에서 혼자 틈틈이 준비해서 시험 날자에 가서 시험을 본다. 합격,

 

그 때로 부터 시작해서 그 다음으로는 대입 大入 검정고시를 또 마치고,  나니 마침 한국방송대학이 대학교로

바뀐다. 그 전 까지는 전문대학 과정이었는데, 학사과정 5년제로 된다. 잘 됐다. 나를 위해서 그렇게 된거다.

 

방송대학을 다 마치고 졸업하기 까지 5년 동안 한번도 제학기에 마치지 못한 적이 없다.

그 많은 시험을 볼 때마다 잘 통과 시켜 주신다.  정한 학기에 학사 學士로 졸업을 하고,    대학원으로 간다.

 

지금 까지는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 틈틈이 준비해서 시험을 보는 걸로 해 왔는데,

신학대학원은  당시에 야간부가 없었다. 정규 신학 석사를 야간에 개설 한 학교가  하나도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직장에 사임을 하고 신학 대학원으로 간다. 

1991년 , 마흔을 넘어서 처음으로 정규 학교에 가게 된다.

 

마침 법무사 法務士자격이 돼서 , 북부 법원 쪽에 법무사 사무실을 개설 하면서,

부천에 있는  서울신학 대학교  대학원으로 오가며 수업을 듣는다.

내가 처음 예수님 만난 교회가 성결교회여서,

 

마침 그 때 법무사 제도가 바뀌어서 법무사가 직접 등기소에 제출 해야만 하던 일을

직원이 대행할 수 있게  규정을 변경해 주신다.  감사. 무지로 소이다.

 

일마다 때마다 도우신다는 건 이런 거 아닌가.

 

무학자가 공무원 시험을 보려고 하니까 학력 제한 규정이 없어지고, 

시험 준비가 제대로 다 되지 못한 거 같아서 미흡하다 싶으니까 시험 일정을 한 달 뒤로 미뤄 주시고,

 

 대학교에 가야 할 때가 되니 방송대학이  학사과정으로  바뀌어서 힘들지 않고 등록금 들지 않고 학사를 받게

해 주시고,  대학원을 다닐 때가 되니까  법무사 직접 제출 제도를 바꿔 주신다.

 

 아 !  홍해 紅海 는 지금도 갈라지는 구나.

 

 

             수유리 한신대학원 시험 보던 날에 있었던 일 ,

 

  흰쾨끼리에게는  進步진보와  保守 보수, 전통 傳統의 구학문과  西風서풍 의 신학문을 만나게 해

주셨습니다.  정규 학교를 다니지 못한 게 ,  이렇게 틀이 없이 자유롭게  되었다고 생각됩니다.

 

검찰에 근무하면서도 틈틈이 특강에 가서 경청을 하는데 연세대 이가원 李家源 교수에게서

 4서 四書와 5경 五經을 듣고요, 성균관대 임창순 任昌淳 선생의 고문독해 강의도 듣고 ,

 

김형석 金亨錫 강의도 듣고, 박목월 朴木月 선생의  " 밤에 쓴 인생론 " 에서 큰 위로를 받고,

기자 반세기  記者半世紀 를 쓰신 유광렬 柳光烈  선생에게서 많은  걸 배우고요,

월정 月汀 선생 정주상 鄭周相 어른 에게서 글'씨를 배우고요,

 

세검정 구기 터널 입구에 있던 민족문화추진회  (  민 추 民推 )  에서 고전 번역하는 신입생으로  

입학해서 공부하기도 하고  : 지금은 한국고전 번역원 으로 개편 되었지요. 

 

 고문독해 古文讀解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계속 공부하고요,

 특별히 초서 草書 로 된 글을 읽는 걸 지금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학교와는 인연이 없고, 가는 데 마다 시험을 봐야 하니, 시험으로만  시험으로만 지나 왔네요.

아주 시험 보는 일로 지쳤지요.

 

그 당시에도 등록금만 내면 대학 졸업장을 받는 수가 많이 있었는데요 . 흰쾨끼리는 그런 게 싫어서

어렵고도 힘든 길을 돌고 돌아서 멀리 멀리 걸어서 걸어서  왔답니다.

 

1960년대 중반에 벌써 가짜 박사 얘기가 목회자 들 중에서 뉴스에 나오기 시작 하는 걸 보고서

너무 놀라서요,   지금 도 그 충격이 남아 있습니다.   천하에 못된 놈들 같으니라구.

 

시험을 볼 때 마다 합격 合格 하는 은혜를 주셨는데, 서울신대와 성균관대에서  대학원 입학 시험을

보던  때에도 특별한 얘기 거리가 있었지마는, 그건 나중에 하기로 하고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입학  시험을 보던 날의 사건은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 싶네요.

 

첫 시간에 영어 였는데요, 다행히 아는 것만 나와서 큰 문제,  중간 문제 ,작은 문제 세 지문을 다

잘 마치고 나니, 안심이 됐지요.

 

 둘째 시간 성경개론 도 잘 쓰고요, 세째 시간 기독교 개론도 그냥 중간은 갈 만큼 해서

 필기 시험을 마치고 , 오후에 면접이 있다고 기다립니다.

 

   면접은 .2시 부터라고 교무과 에서 알려 주는 데요,

그 때부터 나는 걱정이 생겨서 안절 부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이 월요일 이었는데요, 그날 저녁부터 우리 교회에서 부흥회를 하기로 강사님과 오래 전에 약속을

한 날이어서 , 아무도 없는 시골 교회에 낯선 강사님이 먼저 와 있게 할 수는 없고,  내가 먼저 내려 가야

하는데,

 

나는 수험 번호가 뒤 쪽에 있어서 면접을 보려면 몇 시간을 기다려도 차례가 올 수가 없을 거 같고,

서울역에 가서 내려가는 차를 타는 거 까지 는 시간이 어떻게 할 수 없어서 면접을 포기하고 그냥

내려가고 싶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교무과 직원이 수험생들을 불러서 앞번호 부터  일렬로 줄을 세우고 먼저 세 사람을

면접실로 들여 보내는 것이 멀리 뒤에서 도 보였습니다.

 

그런데 조금 후에 안에서 어느 분이 세 사람을 다시 밀고 나오더니 교무과 직원에게 뭐라고 말씀하는

듯 했는데, 오늘은 면접을 중간에서 부터 시작한다고 하면서 내 앞에 번호부터 차례로 세사람을 들어

오라고 합니다.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거지요, 이럴 수도 있나요.

 

첫번 으로 들어가서 면접을 마치고 나와서 죽어라 서울역으로 달려서  가보니 벌써 예매한 차는

방금 전에 떠났고요, 거기서 부터 아무꺼나 출발하는 열차를 타고 천안 역 까지 와서 , 차가 서기도

 

전에 뛰어 내려서  광천으로 가는 열차 선으로 달려가 보니 이미 차가 출발해서 저 만큼 을 가고 있네요,

볼 것 없이 쫓아 가서,   가고 잇는 열차에 뛰어 올라서 광천으로 왔네요.

 

그 때는 열차 문이 열린 채로 다니던 중이라 그렇게 할 수 있엇지요.

 위험 천만 한 일,  달리는 열차에 올라 타는  요령 없이 덮어놓고 이렇게 하시면 큰 일 나요.

 

교회에 가 보니 마침 교인 한 분이 먼저 와서 강사님을 영접하여 함께 말씀을 나누는 중이고요

그날 저녁 부흥회는 신나는 천국 잔치가 열렸음은 물론이고요.

 

 하나님께서는 요, 흰쾨끼리가 형편도 되지 않는 것이 , 시골 에서 남들이 버려 놓고 간  교회를 다시 살려

 보려고 애쓰는 걸 보시고, 대학원 입학시험 출제하는 교수님들에게 , 흰쾨끼리가 알 고 있는 문제만을 출제

하라고 지시하셨고요, 

 

면접하는 교수님에게는 예정에 없이 중간 에서 부터 시작하라고 순서를 변경하셔서 그날 모든 걸 잘

되게 두루 두루 살펴 주셧네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 분은 신약 선생님 황성규 교수님이었는 데요,

아직 까지 그 일을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여기서 감사 로 절을 올립니다.

 

감사 무지로소이다.

지금도 홍해 는 갈라지고 있다니까요.

 

흰쾨끼리는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입학시험을 준비할 만한 시간이 전혀 없었고요,

  저의 실력으로는  감히 뻔도 못하는 형편이었지요.    그런데요, 하나님은 그게 아니라니까요.

 

시험보던 날이 12월 둘째 월요일이니까,   다니고 있는 서울신대와 성균관대에서 기말 고사를 보는

것도 있고, 레포트 낼 것도 있고, 틈나는 대로 법무사 사무실에 가서 일보고 , 주일에는 교회로 가서 예배

 

드리고  집에 오면 밤 12 시경이 되는 데, 원제 시험 준비를 할 수 있냐고요.

제 사정이 그런 것을 아버지께서 잘 아시고요, 그렇게 해 주셨지요.

 

지금도 홍해는 갈라지고 있고요,

감사 무지 로소이다.

 

 추석 명절에 연휴도 있어서 쉬는 주간이 라서요,

우리나라 역사 얘기는 조금 쉬었다 하지요.

 

흰쾨끼리에 관하여 궁금하신 분들이 있는 거 같아서요,

흙수저도 못되는 무학지인이 지나 온 얘기  일부를 올려 봤는데,   널리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어느 나라에든지 금수저 도 있고, 은수저 동수저 도 있고, 나무 수저도 있고, 흙수저도 있겟지요.

그런데 그런 흙수저 조차도 물고 나온 게  없는 흰쾨끼리는 ,

 

빈들을 헤매고 다니면서 , 죽은 약대 가죽 을  주워 입어서 옷을 삼고, 메뚜기를 잡어  먹으면서

 살던 사람같이 갈 곳이 없었던 인생,  야생으로 살아온  자연인 이었지요,

 

민족의 비극이라는 6.25 전쟁의 총소리를 들으면서 태어난 흰쾨끼리는 , 같은 또래 들과는 다른 길,

너무나 다른 길로, 세상 여기 저기 구경하면서  걸어 왔답니다.

 

 

 

 

 

팔월 보름 날  저녁에,

밖에 나가 보니 동편 하늘에 둥근 달이 뜨네요.

 

오늘은 명절 잘 보내시고, 가족들과 함께요 도란도란 ,

 자는 자들 중에 계시는 조상님을 성경에 비추어 얘기 해 보시지요.

 

 

 

 

         평지교회   흰쾨끼리   올림.


김종백(제주노회,신흥교회,목사) 2020-10-04 (일) 20:20 3년전
목사님! 목사님의 지나온 그리고 지금도 홍해를 가르시며 인도하시는 역사를 듣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명절 잘 보내셨지요? 육지에 나갈 기회가 되면 광천에 한번 들르겠습니다.

뵈올때까지 늘 강건하세요.

제주에서 김종백 목사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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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규(충남노회,당정교회,장로) 2020-10-04 (일) 21:08 3년전
목사님 께서 청년시절  지나면서 여러 일들    지금도 홍해가 갈라지는  역사를 체험하시며
사역하시는 목사님 존경합니다,  기회가 온다면 목사님과  좋은 대화 나누고 싶어지네요,
공적으론 내년 1월에나 뵈올것 같네요
목사님  항상 강건 하시길 기원합니다,
                      김문규 장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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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식(충남노회,평지,목사) 2020-10-05 (월) 09:38 3년전
김 목사님, 장로님, 반갑네요
    명절을 잘 보내쎳구요 ,

    찬이슬이 내린 다는 한로 寒露 가 가까운데요,
    조은 계절에 은총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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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곤(충남노회,평지교회,목사) 2020-10-05 (월) 11:07 3년전
오늘은 긴 秋夕연휴를 보내고 새롭게 시작하는 월요일,
 활기차게 소망의 주님을 바라보며, 항상 주님과 함께 열정적으로 사명에
충실하신 신흥식 목사님 존경합니다 .
하나님의 은혜로 사신목사님,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고자 하시는 계획에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동을 받습니다.
존경합니다.  신흥식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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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양권(인천노회,사랑의교회,목사) 2020-10-05 (월) 21:00 3년전
성양권 (인천노회 사랑의교회 성양권목사)

대학원에서 만나 함께 공부한지도 25년이 자났네요  그때 속이 꽉차신 목사님이심에도 신학앞에서는 아무것도  없는 마냥 그 먼거리에서부터 배움에 목말라하셨던 신목사님 참 반갑습니다. 노회원들과 교회탐방하여 들었던 한문역사풀이가 얼마나 해박하셨던지요.
모세의 하나님은 기적의 하나님이시요 우리의 하나님이시기에 저도 기적을 믿습니다. 1초 사이에서도 살고, 고속도로에서 덤프트럭차에 받쳐서도 살게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요. 목사님 삶의 뒤안길이 그토록 아팠어도 감사찬송하시는 글에 은혜가 가득합니다
70에 은퇴하실 수 없는 교회는 아니신가요?  농촌교회 목사님들의 실상이라 하던데요  후편이 있다면 홍해를 가르셨으니 요단강도 건너가게 하실것 같은데 명절 끝의 생수로 배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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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호(대전노회,공주세광교회,목사) 2020-10-05 (월) 21:31 3년전
"무학자가 공무원 시험을 보려고 하니까 학력 제한 규정이 없어지고,
시험 준비가 제대로 다 되지 못한 거 같아서 미흡하다 싶으니까 시험 일정을 한 달 뒤로 미뤄 주시고,
대학교에 가야 할 때가 되니 방송대학이  학사과정으로  바뀌어서 힘들지 않고 등록금 들지 않고 학사를 받게
해 주시고,  대학원을 다닐 때가 되니까  법무사 직접 제출 제도를 바꿔 주신다."

힌 쾨끼리님의 하나님은 지금도 홍해를 가르시며 동행하심 잘 읽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양지의 하나님, 우리 모두의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지금도 홍해는 갈라지고 있습니다. 매일 오(5)! 감사를 쓰면서,  양지 드림.
주소
신흥식(충남노회,평지,목사) 2020-10-06 (화) 06:56 3년전
성 목사님, 이 목사님,

    감사요, 명절 잘 보내셨지요

    우리 기장교회위에 도, 홍해가 갈라지는
  일이 생겨나고 있겠지요

    무학지인  흰쾽끼리  올림,
주소
김명섭(경북노회,평화동교회,목사) 2020-10-07 (수) 11:38 3년전
목사님 안녕하시지요?
목사님의 글을 읽으니 지금 상황쯤은 견디기가 식은 죽 먹기보다 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사님 건강하십시오^^
경상도에서 김명섭 올림
주소
신흥식(충남노회,평지,목사) 2020-10-07 (수) 13:53 3년전
김 목사님, 오렷만이네요.
  그간에 잘 지내시구요,

  이렇게 글을 보니 반갑네요,
  이것도 지나가리라.

  코로나가 지나가고
  조은 날이 오기를 기도하지요,

  감사,
주소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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