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쾨끼리는 이조 李朝 라는 말을 싫어 합니다.
조선 朝鮮 이라는 말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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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그거지 뭐 어떠냐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그렇지 아니합니다.
저도 철 모를 때에는 그런 줄 모르고 그냥 썼엇는데요, 나중에 알고 보니 ,그건 일본 사람들이 조선을 격하시키려고
만들어 낸 말이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이씨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었는데,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그대로 써 왔지요.
그 뒤로는 이조라는 말이나, 이씨조선이라는 말을 하는 사람들을 보던지 , 그런 간판을 보면 아주 싫어집니다.
얼마전부터 " 초등학교 " 라는 말을 찾아서 쓰는 게 얼마나 좋은 지 모릅니다.
그래야지요, 진작이 그렇게 했어야 지요.
조선 朝鮮은 " 아침 풍경이 아름다운 나라 " 라는 의미가 있는데요,
영문으로 써보면 더 신기합니다. CHOSEN , 그러치요, 선택된 나라 백성들이지요
동방에 예비된 백성들,
이른 아침에 그 동녘이 밝아 오는 고요한 광경, 그 신비한 모습을 그리워 하던 자손들,
그런데 실제로는 수난의 백성들이었답니다.
인조 반정 仁祖反正 : 나라 망하는 시작,
그동안 나라를 맡아서 살림을 한 이들은 주로 동인 東人들이었지요.
이산해 李山海도 , 유성룡 柳成龍도 다 그런 분들이었어요.
능양군을 추대하여 나라를 뒤엎은 이들은 서인 西人들이었구요.
김류 金 流+玉 와 이귀 李貴 를 중심으로 한 공신들이 좌지 우지 하는 정부였지요.
이 때로부터 서인 정권은 나라 망할 때 까지 계속 되는데, 노론으로 소론으로 오고 가면서
나라의 모든 여론을 노론 일색으로 만들어서, 조금이라도 다른 말을 하면, 죽어도 용납이 되지 않는 나라,
사문난적 斯文亂賊 으로 매도 되고 , 이단으로 지목이 되는 사람은 살아 갈 수가 없는 세상,
만약에 주자 의 학설에다 조금이라도 다른 내용을 더하는 날이면 그건 용서 하지 않는 나라,
조선을 소중화 小中華 라고 자칭하기도 하고, 명 明나라만을 부모님 받들 듯이 하려던 사람들이 살던 나라.
한 선생의 문하에서 같은 제자들이라도 이단으로 찍히면 자진하게 만드는 나라,
인조 정부는 시작부터 삐걱거린다.
반정을 마무리 하기도 전에 벌써 공신들간에 알력이 생겨서 내분이 커졌다.
가장 큰 문제는 반정군대를 지휘한 이 괄 李适 장군에 대한 공신등급을 2등급으로 내려서 대접한 거다.
처음부터 반정 모의에 참여한 게 아니고, 중간에 가담하게 됏다는 이유로 2등으로 밀렷는데,
반정 군대 출병 시간에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늦게 왔던 김류 때문에 반정이 실패할 뻔 했었는데도 김류 는 1등을
주었으니, 억울한 이괄은 임금님 면전에서 칼을 들어 김류를 죽일 려던 걸 보고 이귀 가 말려서 겨우 진정되었다.
그런 중에도 이 괄에게 위험을 느낀 문신들은 너나 할 거 없이 이 괄을 멀리 북방의 경비를 맡은 함길도 병마사로
보내고, 그후에도 안심이 안돼서 여러 경로를 통해서 이괄을 의심하는 동태를 보엿으니, 이괄은 이래 저래
임금님의 의심을 받게 되엇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과 처는 볼모를 잡히고 ,
결국은 반란을 일으키지 아니할 수가 없었고, 한양이 점령되고 , 인조는 공주로 도망하고,
아무런 공로도 없이 1등공신의 자리에 앉은 문신들은 결국 충성된 장수 이 괄을 반역자가 되도록
유도하였으니, 이 괄은 죽도록 써 먹고 내 팽개쳐진 장수였다고나 할 까.
억세게 재수 없는 사나이,
당연히 1등공신, 그 중에서도 제일 앞자리에 앉아야 할 이 괄을 돌려 놓고 , 아무것도 아닌 문신들끼리
1등공신 자리를 다 차지하였으니, 세상에 이런 열 받는 일이 워딧나.
그 때 청나라로 도망한 이괄의 부하들이 청나라에 조선을 공격하자고 고발을 하니, 결국은 나라가
어디로 가는가. 정묘 호란은 그렇게 일어나고, 궁중은 강화도로 피난가고,
웬 난리냐 , 이게 .
명분론 名分論으로 거덜 나는 나라.
공신들은 누구라고 할 거 없이 전부 힘을 쓰게 된다.
그래서 생긴 당이름이 많다.
본래는 서인 들인데 새로 들어선 정부 아래서 많은 당명이 생긴다.
윤서 尹西 라는 이름이 있다. 윤두수 尹斗壽 를 중심으로 한 서인들이다.
신서 申西 는 상촌 象村선생 신흠 申欽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원당 原黨 이라고 부원군 원두표 元斗杓 를 중심으로한 세력이다.
락당 洛黨은 역시 부원군 김자점 金自點 을 따르는 당이다.
너무 힘이 세서 얼마후에 역적이 된다.
그 자손들이 황해도에 숨어 살게 되고, 거기서 金九 선생이 나온다.
산당 山黨은 김장생 의 자제 김집 金集과 송시렬을 비롯한 산림의 사람들이고,
한당 漢黨은 한강에 주로 사는 사람들 김육 金堉 과 그 제자들이다.
이 많은 당명을 가진 중앙 정부는 오랫동안 논쟁을 하면서 서로 물고 뜯는다.
명분론은 언제나 상대방을 공격하는 데 강력한 힘을 가진다.
그속에 아무런 실익이 없는 명분론은 사람을 피곤케 하고 나라를 망하게 한다.
그러면서 말하는 그 사람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그 모순에 빠지게 된다.
그렇게 그런 속에서 우리들은, 우왕 좌왕 하면서 이제까지 지나 왔다.
정묘호란 은 그런대로 잘 지나갔다고 안심을 할 만 하였지마는.
뭘 모르는 사람들의 큰 오해였다.
인조의 정부에는 그 정묘호란이 들려 주는 경고음을 들을 만한 일꾼이 없었다.
이제 곧 병자호란이 일어나는 데도 거기에 대한 대비는 할 줄 모르고, 큰소리만 쳤다.
청나라에서는 몇차례 사신을 보내어 지난 번 정묘호란에 형제의 관계로 맺은 걸, 군신 君臣의 관게 로 고칠 것을
요청해왔다. 그럴 때마다 정부안의 대신들의 의견은 말할 것도 없이 거절 이었다.
강경론 일색.
거절일 뿐만 아니라,그 사신을 돌려 보내지 말고 죽이자고 열을 내었다.
그렇게 하면 그 다음에 뭐가 온다는 건 생각을 하지 않고 무작정 큰소리를 쳣다.
마치 초등학교 아이들이 하는 거 처럼, 아무런 대안도 없이 우겨 대는 말만 하엿다.
누구라고 할 거 없이 다 그런 중에도 강력하게 앞장선 이는 김상헌 金尙憲 이었다.
한 사람, 그런 어려운 분위기 속에서 한 사람 최명길 崔鳴吉 이가 있었다.
현실을 감안 할 줄 알고, 고통하는 백성들을 염려할 줄 아는 책임자였다.
말도 되지 않는 요청이라 할 지라도 , 거절하지 말고 일단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가지고
서로 얘기를 해보자는 자세였다. 다음에 다가올 재난을 미리 방지할 수 있는 대로 막아 보고자 하는
의견이었다.
강경론으로 뒤덮인 조정 안에서 최명길의 입장은 설 자라가 없었다.
사람들은 도리어 최명길을 죽이려 하는 자들도 있었다. 그게 애국심인 줄 알았다.
결국은 청나라 군대가 조선을 쳐들어 온다.
병자 호란. 1936년 섣달, 제일 추운 때, 소한 대한,
압록강 이 얼기를 기다려서 쳐내려온 청나라 군대는 임경업 林慶業 장군이 지키고 있는
백마산성을 피하여 일부러 군대가 없는 지역으로만 골라서 서울 漢陽 으로 직행한다.
청태종이 직접 인솔하는 청나라 군대의 맨 앞에는 조선 사람 정 명수 鄭命壽 가 안내를 맡고 있다.
이 사람은 강홍립 장군을 따라 전쟁에 나가서 항복한 뒤에 청인의 말을 배워 청군의 심복이 되고
조국을 배반한, 철저한 반역자가 되어 가지고 왔다.
그 전쟁 중에도 청나라 장수 용골대 龍骨大와 마부대 馬夫大의 통역을 하면서 조선의 대신들을 종부리듯
괴롭히고, 전쟁 후에도 이 사람에게 조선 정부는 뇌물을 강요 당 하는 대로 주어야 하고, 자기 친척들을 요직에
앉게 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못된 짓을 하는 데도, 울며 겨자 먹기로 따르는 수 밖에 없었다.
청나라를 등에 업은 망나니에게 조선은 상하가 전부 처절하게 고통을 받는다.
사람이 얼마나 더럽게 까지 배신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걸 이 사람에게서 보게 된다.
싸우자고 떠들던 정부는 부랴 부랴 피난을 가는데, 느닷없이 터진 일이라 경황이 없어서, 지난번 처럼
강화도로 가려고 하다보니 이미 청군이 길을 막았다는 정보에 어쩔수 없이 남한산성으로 돌린다.
강화도 함락 : 자결하는 백성들.
그 난리 통에 남한 산성으로 갈 수 없는 궁중의 여인네들은 , 그래도 강화도로 가는 수 밖에 없었는데,
강화도의 총책을 맡은 김경징 金慶徵 ( 1등공신 이조판서 김류 의 아들 )의 어림 없는 방책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친다.
그 때, 그 난리통에 배를 태워 주려고 사공이 양반 댁 아기 씨를 손을 잡은 일이 있었는데, 그 렇게 남자가 자기
손을 잡았다고, 견디지 못하여 자결하였다. 그게 조선 여인 의 심성이었다. 한국인은 그런 사람들이었다.
어리석을 정도로 까지 순결하고, 정직한 사람들, 조선 백성들,
식민지 시절에는 그런 사람들을 끌어다가 일본 군대가 또 못된 짓을 하고서도, 아니라고 오리발이지.
그 자매님 만 그런 게 아니고 그 후에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는 날, 거기 피난 가 있던 조선의 인민들은
남녀 할 거 없이 자결, 자결 또 자결하였다.
선비들은 선비들 대로, 내명부의 內命婦의 귀부인들은 귀부인들대로, 일반 사가의 부녀들은 부녀들대로,
청군에 더럽히지 아니하고 죽음으로 자기를 지키려 하였다. 그게 조선 백성들이었다.
강화도에 군비를 맡은 책임자 김상용 金尙容 은 청군이 들어온다는 말을 듣고 군기고에서 폭탄을 안고
제 몸을 산화 시켰다. 그 자손들이 전쟁 후에 충남 홍성 갈산 으로 와서 정착하였고, 후손이 김 좌진
金佐鎭 장군이다.
동생 김상헌 金尙憲은 임금을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가고, 전쟁이 지난 후에 장동 壯洞 김 씨라는 명문이 되어서
조선이 없어질 때 까지 권력을 가지고 사는 세도가의 조상님이 된다.
장동 김씨네 마을은 지금 청와대 옆, 인왕산 아래, 옥인동주변 이었다고 한다.
강화도에 , 뭐 좀 안다는 사람들은 전 부 자결하는 데, 자결 할 수가 없는 사람이 한 분이 있었다.
훗날 소론 少論 의 대표가 되는 명재 明齋 선생 윤 증 尹拯의 아버지 윤선거 尹宣擧 라는 분,
강화도에 피난 올 때, 나이 많으신 아버지를 모시고 오지 못하고 어디에서 떨어지게 됐다.
아버지는 윤황 尹煌 이신데, 댱시에 대사간 大司諫 을 역임한 분이었다.
그 아버지 걱정에 가만히 있을 수가 없어서 , 천민 복장으로 변장을 하고 아버지를 찾으러 나가느라고 자결을 하지
못했다. 그 부인은 이미 자결 하였고, 가까운 친구들도 이미 다 자결을 했고, 본인도 자결하기로 약속을 했었는데,
아버지를 놔 두고 먼저 ,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죽지 못하게 됐다.
그 후로 이 어른은 평생을 참회하는 마음으로 밖에 나오지 아니하고 공부하며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마친다.
우리는 여기서 이 분이 하신 일을 보면서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누가 여기에 돌을 던질 수 있나.
결국 이 사건은 뒷날 송시열로 하여금 제자 윤증 의 간곡한 부탁에도 불구하고 윤선거 의 신도비를
써 줄 수 없는 사유가 되었고, 결국은 윤증과 서로 갈라지는 老論노론, 少論소론의 빌미가 된다.
삼전도 麻田渡 의 굴욕.
삼전은 삼밭을 말한다.
그 주변에 삼밭이 많이 있어서 그런 이름이 생겼을 거고, 당시에는 삼을 심어서 길쌈을 하는 일이 큰 생업이
었으니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한문으로 쓰려면 마전 麻田인데, 거기에 나루터가 있어서 마전도 麻田渡가 된다.
지금 삼전도 三田渡 라고 표기하는 건, 재고를 요한다.
거기에서 인조 가 청태종에게 항복한다.
거기에 그 사실을 기록한 삼전도 비도 있었다.
좋은 것만 기념할 것이 아니라 나쁜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떻게 했길래 이런 수치를 당하게 되었던가. 그것을 알게 하는 게 우리의 일이다.
남한 산성의 얘기는 입에 올릴 필요도 없다.
이미 뻔한 걸 가지고 그 쓸데 없는 논쟁을 하느라고 인민이 다 죽게 되었으니, 이게 무슨
정부 대신들이냐. 얘기 거리도 못된다.
인조가 항복하려고 청나라 군대에게로 가까이 걸어 가는 동안 ,그 청나라 군대 막사에서는
끌려온 조선 여인들이 떼를 지어 울면서 살려 달라고 임금님에게 부르짖는 소리가 들린다.
밖을 내다보며 살려 달라고 울며 부르짖는 그 호소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는 다시 물어 볼 필요도 없다.
죄없는 백성들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서도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저 많은 대신들은 뭐하는 자들이냐.
세상을 볼 줄도 모르면서 친명정책으로 회귀하고, 광해군의 그 밝은 개선 책을 내 팽개치고, 공신들간에
배부르게 먹고 놀던 이 사람들의 무지한 정치로 나라는 거덜 나고, 임금은 항복하고,백성은 잡혀간다.
50 만이 넘는 포로들, 끌려가는 북행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나라가 이렇게 참혹한 상태로 된 걸 보고, 더이상 아버지를 괴롭게 하지 아니하려고
자진해서 청나라에 볼모로 가려고 나선다. 그렇게라도 해야 청군의 괴롭히는 일이 끝날 거 같아서다.
인조는 죽을 때 까지 이 수치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나라가 잘 될 리가 있는가. 소현 세자의 갑작스런 죽음도 이와 관련이 있고, 뒷날 효종의 그
북벌론이라는 것도, 엉터리도 없는 거 같지만, 이런 데서 기인하고 있지 않은가.
대신들은 말할 것도 없고 대소 관료들 , 일반 백성들이 전부 이 충격을 벗을 수가 없었다.
뭐 좀 생각이 있는 신료들은 벼슬을 버리고 산으로 가고, 그럴 수가 없는 사람들은 숨어서 자제들을
가르친다. 족보를 정리하고 , 가승 家乘을 챙겨서 전하고,
최명길 崔鳴吉은 전쟁 후에도 마무리 수습을 다 하기 까지 죽을 힘을 다하여 청나라로 불려 다니며
나라를 위하여 거짓말을 하기도 하고, 들통이 나서 감옥에 갇히 기도 한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결사항전을 주장하던 강경파만을 존경할 뿐이지, 최명길의 수고는 알아 주는 이가
없다. 그 당시에도 그렇고 지금 도 김상헌 만 귀한 줄 알고 있지, 온건론의 대안을 제시한 사람은 알아 주지
아니한다. 그 분의 수고로 우리는 살아 왔는데도 그렇다,
왜 그런가.
이제라도 이런 걸 고쳐야 한다.
언제나 어려운 사건 앞에서 아무런 대안도 없이 큰 소리만 치는 강경책은 일만 그르친다.
그걸 수습하고 민생의 길을 열어 주는 온건론은 많은 지혜를 필요로 한다. 인내도 따른다.
나중에 심양 瀋陽 감옥에 최명길 崔鳴吉과 김상헌 金尙憲 이 함께 들어가 있게 된다.
거기에서 두 분은 서로의 얘기를 하게 되고 그간의 달랐던 소신을 서로 이해 하게 된다.
항복문서를 쓰던 최명길도 애국이었고, 그 문서를 찢어 버렸던 김상헌도 애국이었다는 걸
두 분은 서로 이해하고 , 먼 나라 감옥에서 서로를 위로한다.
대인 들의 모습이다.
김상헌이 찢어 내 버린 항복문서를 다시 주워서 다듬는 최명길의 심정은 어떠했으랴.
아니 이 세상에 항복을 좋아서 할 사람이 어디 있나,
나라와 백성을 살리려니까 어절 수 없이 , 싫어도 온 몸으로 하는 수 밖에 없었지.
정부의 책임 자라면 백성들을 위하여서 ,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거 아닌가.
포로 들의 애환,
정주 定州 목사 牧使 와 곽산 郭山 군수는 청나라 군대에 사로 잡혔고, 그 처자들도 같이 붙잡혔다.
그 처자들은 수가 많았는데, 다 청나라 군대들에게 끌려가서 윤간을 당하고, 그 부대 안에서 청나라 군대
지휘관의 노리개가 되었다.
죽기보다 싫은 일이었지마는 피할 도리가 없으니, 워쩌냔 말이지,
그런데 더 가관인 것은 , 그 처첩들을 이동할 때마다 말을 태워서, 정주 목사와 곽산 군수에게 그 말고삐를
잡게 하엿다. 죽을 맛이다.
에스더 에 나오는 하만이 죽이려던 모르드개를 , 임금님 말에다 태워 가지고 그 말고삐를 잡고 성중을
돌면서 하루 종일 외치고 다니던 거 처럼,
정주 목사와 곽산 군수는 포로가 돼서, 윤간 당한 자기의 여자들을 말에 태우고 , 그 고삐를 잡고 가면서
자기 여자에게 힐책을 한다. 왜 정조를 지켜서 죽지 못하고 이렇게 되었느냐고,
책망을 듣는 여자는 여자대로, 당신은 왜 임금님의 신하가 돼서 이 모양이 되었느냐고 되묻는다.
정주 목사는 김 진 金 搢 이고, 곽산 군수는 이유건 李有建 ( 李由楗 으로 쓰기도 ) 이었다.
임금으로 부터 모든 백성이 다 겪는 이 수치스런 모습을 어찌 씻을 수 있나.
전쟁 후에 형편이 되는 사람들은 돈을 가지고 가서 개별적으로 포로들을 찾아 온다.
돈이 없거나 , 찾아 줄 만한 가족이 없는 사람들은 그냥 거기서 노예로 산다.
거기서 탈출해서 오다가 붙잡히는 사람도 잇고, 어떤이는 압록강 변 까지 와서 귀국을 하려니까,
군인들이 오지 못하게 도로 가라고 쫓아 낸 사람도 있었고, 천신만고 로 귀환을 해도 반기는 이가 없고,
반정 反正 이라는 건 잘못된 걸 바로잡는 다는 의미인데,
인조반정은 나라를 기울어지게 하는 시작이었다.
충성스러운 장수를 긁어서 반역자가 되게 하는 걸로 시작해서 , 피할 수도 있엇던 청나라의 내침으로
온 나라는 쑥밭이 되고, 실속 없는 명분론 만이 강성해 져서 앞으로 오는 세상을 두고 두고 혼란케 만든다.
오늘 얘기는 여기서 쉽니다.
오랫먄에 하늘이 보이네요
온 누리에 재난이 멈추기를 기도 하며,
평지교회 흰 쾨끼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