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너미 고개
게네미 고개라는 이름은 순수한 우리 말이라서 듣기가 좋다.
그 당시에 어른 들은 그걸 한문으로 써서 해현 蟹峴 이라고 불렀다.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에 있다는 데 흰쾨끼리는 가보지 못했다..
먼 시골에서 어려운 교회를 비워 둘 수가 없어서 하루라도 먼길을 가지 못한다.
게네미 고개라고 불리게 된 연유는 무슨 사연이 있었다는 데, 그 동네 연곡리 강물에 살던 게 들이 나와서
고개 넘어 광적리 쪽으로 가는 일이 있엇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생긴 이름이니, 호기심이 생긴다.
해 蟹 라는 글자는 물에 사는 게 , 게 해 자이다. 현 峴 은 고개 현이다.
그런데 그 이름 말고도 같은 뜻으로 쓴 이름이 몇 개 더 있다.
해유치 蟹蹂峙 , 해유령 蟹蹂嶺 이라고도 부르는데, 모두 같은 뜻이다.
유 蹂는 넘을 유 이고, 성경의 유월절 도 이 글자를 쓰는데, 踰라고도 쓰고 , 逾로 도 '쓴다.
한문에서 足이 들어가거나, 책받침 이 들어가면 걸어가는 거, 멀고 가까운 거, 길과 관계가 있는 수가 많다.
치 峙 는 산고개 치 이고, 령 嶺 도 고개 령 이니, 같은 걸 그렇게 쓴 거다..
여기에서 현 峴이나 치 峙 나 령 嶺 은 전부 고개를 나타내는 데, 높고 낮은 데 따른 차이가 있다.
낮으막한 것은 峴에서 부터 차례로 더 높은 건 峙 , 아주 더 높은 거는 嶺 으로 보면 무방하다.
현은 동네 마다 다 있고, 치는 조금 높은 산에 있고, 령은 강원도 와 태백산맥을 따라 가면 보게 된다.
전쟁은 가고 , 백성들의 삶의 현장은,
전쟁은 끝났다고 하지마는 포로로 끌려간 조선 백성들과 황페화 된 땅에서 살아야 하는 백성들의 고달픈 현실은
필설로 다 형언 할 수가 없었다. 살아갈 만한 형편이 돼서 산 게 아니고, 죽을 수가 없어서 살고 있엇다.
그 참혹한 현실에 대한 기록은 류성룡의 징비록 懲毖錄 에 잘 나와 있다.
먹을 게 없는 건 물론이고, 아픈 사람 , 옷입을 게 없어서 겨울에도 떠는 사람, 영의정 의 주변에 까지 와서
통곡하는 사람들의 호소를 누가 다 해결할 수 있으랴 .
어미는 이미 죽어 있는 데, 어린 아이는 어미 젖을 물고 울고 있는 아이를 누가 봐 준단 말이냐.
전쟁에 죽지 않고 , 국내에 남아 있는 백성들은 그래도 괜찮은 거다
포로가 되어 일본으로 끌려간 사람들은 노예시장에서 팔려서 네넬란드 상인들을 따라 유럽으로 가기도 하고
거기서 세례받은 사람도 있고, 한복을 입은 조선 남자 그림도 볼 수 있다.
포로들의 상황을 알아 볼 만한 기록이 있는데 강항 姜沆 이라는 분이 포로생활을 하면서 쓴 간양록 看羊錄
에 참혹한 모습이 들어 있다. 강항은 형조 좌랑 벼슬을 하고 있엇는데 배를 타고 피난하다가 붙잡혀 갓다.
강제 노역에 동원돼서 고향을 그리면서 죽어가고, 도자기를 만드는 기술자들은 그릇을 만들어 팔면서
돌아 오지 못하는, 바벨론 포수의 삶이 시작된다. 정부 책임자들의 잘못으로 고생하는 이는 백성들이 다.
10 만이 넘는 전쟁의 포로들, 끌려간 나라에서 아직도 소식이 없다.
그런데, 이건 뭐라고 해야 하는가,
그 때 부터 조선 도공들의 만들어 낸 그릇이 일본의 주 상품이 돼서 유럽으로 수출을 하게 되고 그 수익으로
일본은 일어나 살게 되었다는 것과, 도공 이삼평의 평범한 거 같은 막사발이 일본의 국보 1호가 됐다니,
지금 본 차이나를 비롯한 유럽의 고급 도자기 기술이 조선 도공들의 기술이 바닥에 깔려 있다고 하니.
처참한 전쟁으로 조선의 기술이 넓은 세상으로 펴 나가게 되엇다고,
도와 주는 이 없는 왕 의 자리에서,
이럴 때, 광해군은 새로운 임금이 된다.
왕이라고는 하지마는 어렵사리 어렵사리 왕이 되고 나니, 이 후부터는 산너머 산이다.
아무도 광해군을 왕으로 인정을 해 주지 않는 분위기에서, 힘없는 새 임금은 뭐를 할 수 있느냐고,
아버지 선조가 죽으면서 대신들에게 광해군의 배다른 동생 영창대군 永昌大君을 왕으로 세우라고 부탁을 해
놨으니, 광해군이 무슨 왕노릇을 할 수가 있겟느냐고,
영창대군은 나이가 어리지마는 정비의 몸에서 난 적손이라는 프레미엄을 갖고 나왔는데,
광해군은 임금이 될 수가 없었던 서손의 둘 째 순번에 있던 신분으로서 , 전쟁이 터져서 선조가 피난 가면서,
후계자 필요 때문에 서둘러서 세자를 삼앗던 거지 , 왕을 시켜줄 뜻은 없었던 거다.
형편상 잠시 일회용으로 쓰려던 거 뿐,
광해군 위에 친형이 있엇는데, 임해군 臨海君 이라고, 거기에 붙은 인물들이 왕을 뒤엎으려고 하니, 그걸 수습하고
나면, 선왕의 부탁을 받은 정승들은 영창대군의 어머니 인목대비와 함께 , 8세 된 영창대군이 나이 들기를 기다려
임금을 바꾸려고 하는 눈치가 선연 하니,
그냥 있을 수가 없어서 그걸 급한 대로 처리하고 나면, 높으신 나라 중국의 황제는
광해군 임금 됨을 승인을 해 주지 않고 이런 저런 이유를 달고 자꾸 애를 먹이네.
동서남북에 안팎으로 아무도 원군이 없는 상황에서, 광해군은 세제 개혁을 추진한다.
대동법 大同法
그 개혁이라는 건 대동법 大同法의 실시 였다.
이건 화약을 지고 불에 들어 가는 거였다.
조선 백성들을 괴롭히는 세금 을 통합하여 징수하는 법,
그게 대동법이었는데,
대동법을 실시하면 백성들의 부담은 반으로 줄어 들고 국고는 더 채워지는 개혁안이었다.
오리 정승이라 불리는 이 원 익 李元翼 이 나중에 어느 정도 시행을 해서 효과를 보게 되었지마는,
광해군 당시에는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일이었다.
백년 후에야 김육 金堉 이라는 개혁자 정승이 나와서 어느 정도 시행이 되는 제도다.
그걸 해보려고 하는 광해군은, 되지도 않는 일을 해보려고 달려든다. 너무 딱하다.
양반들의 특권이 다 없어질 뿐만 아니라. 왕실의 종친들과 궁중 비빈들이 받던 혜택도 사라지게 되는
일이니, 누가 찬성을 하겠는가. 아니 가진 자들에게 부담을 주는 법을 누가 찬성하느냐고,
그런 위험 천만한 일을 시행하려고 하는 광해군은 , 전쟁터를 돌아 다니면 서 백성들의 아우성 치는
고통소리를 직접 보았고, 자기도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 재정의 궁핍을 절절이 경험한 바 있었던 터였다.
전쟁터에서 몸으로 깨달은 거,
선조는 피난을 가면서 분조 分朝 라는 걸 시행한다.
국가 업무를 보는 조정 朝廷 을 둘로 나누어서 일부는 자기를 따르게 하고 일부는 광해군을 따르게 해서
광해군으로 하여금 임금 대신 , 전쟁중에 국내 업무를 맡아 보게 하였던, 전시 체제의 정부 운영이었다.
광해군은 지방의 수령들, 관찰사를 순방하면서 국내 백성들을 다독이는 일을 하고 다닌다.
현장을 돌면서 백성들의 공세 부담이 너무 많다는 걸 알았다. 공세에 눌려 견딜 수가 없어서 집을 버리고
유랑민이 되는 사람들이 부지기 수라는 걸 알게 되었다.
논과 밭에 정해진 토지세는 말할 것도 없고, 특산품을 올려 드리는 진상품에다. 계절 마다 올려 드리는 명목으로
아전들이 뜯어가는 공세는 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어느 현감이든지 현감은 중앙 정부에서 파견하는 거니까 임기가 정해져 있고, 아전은 그 동네서 죽을 때 까지
아전이고 또 그 자녀들이 아전을 세습한다. 그런데 아전들에게는 일정한 급여 가 정한 게 없다.
지금으로 말하면 면사무소 민원 창구에 직원들은 월급이 없고 알아서 살아가라는 거다.
급여가 없는 아전들은 백성들을 뜯어 먹는 게 당연하였다.
아전들이 현감을 속이는 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리고 얼마 있으면 임기가 차서 간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 눈만 피하면 된다.
그 아전들이 백성들을 어떻게 갈취하는 가는 물어볼 필요도 없다.
노하우가 수십가지 다.
그런 걸 다 보고 알게 된 광해군은 자기 신분이 위태 위태 한데도 불구하고 대동법의 실시를 더 미룰 수가
없었다. 나라와 백성을 살리려면 화약을 지고 불속으로 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 전에도 벌써 대동법은 안이 만들어져 있었고, 몇차레 시범적인 시행을 해서 좋다는 결과를
받은 바 있었는데도, 반대자들의 강력한 힘에 밀려서 시행을 하지 못하고 있던 참이었다.
명 明 청 淸 전쟁에서
그러던 중에 마침 청나라에서 명나라를 공격하는 전쟁이 터진다.
명나라와 청나라의 가운데 있는 조선은 명나라의 요청으로 지원군을 보내게 된다.
여기서 광해군은 명나라를 도와 줄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강국 청나라를 거슬릴 필요가
없다는 걸 알고 , 마지 못해서 출병케 한다. 출병하는 장수 강홍립 姜弘立 에게 알아서 하라는
밀지를 준건 말할 필요도 없다.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보수층은 바로 이걸 문제로 삼는다.
대동법 얘기는 뒤로 감춘 채, 그 알량한 명분론으로 공격한다.
패륜아로 만든다. 국가의 기틀이 되는 충효에 어긋나는 사람으로 만들어서 왕을 추방한다.
실제 내용은 대동법 을 실시하는 게 싫엇지마는 명분은 패륜 悖倫 이었다.
명나라의 은혜를 배반하면 아니된다 는 명분론으로 부터 광해군이 지금 까지 형제들을 귀양보내고
죽이고,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고, 이런 게 다 임금의 자질이 모자라서 임금 자리에서 쫓아내야 한다는
논리를 편다.
그렇게 해서 배다른 동생 정원군 定遠군 의 아들 능양군 綾陽君을 왕으로 바꾸어 세우니,
능양군 이가 바로 인조 仁祖 가 된 다.
아버지 선조가 임금 되기를 싫어 하였는데도, 어찌 어찌하여 어렵게 어렵게 왕이라는 자리에는 올라
갔지마는 서출의 몸으로서 , 위로 아래로 임금 자리를 엿보는 형제들이 즐비한 중에 왕권을 세워보지도
못하였고 ,
아무도 찬성하지 아니하는 개혁을 해 보려고 혼자 헤매다가 쫓겨난 임금이여,
개혁자라는 건 언제나 그렇게 된다고요 . 광해군이여,
정도전도 , 조광조 도 그리고 또 광해군도, 그 뒤로도 또 정약용도, 또 그 다음도,
군대를 동원한 중신들의 반란에 좇겨나서 강화도에 유배되고, 거기서 또 배를 타고 먼 제주도로 가고,
그렇게 세상을 떠난 슬픈 왕이여, 백성들의 고달픈 삶은 언제 까지나, 언제 까지나,
코로나 19로 모이지 말라는 행정명령 내린지 3주째 되는 날,
내일은 백로 白露 인데, 강력한 태풍 하이센이 남해에 올라 오는 중이라고,
다음 주에는 코로나 해제 되기를 기도하며,
평지교회 흰 쾨끼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