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십여년 만에 다시 노비로 돌아 가라는 판결을 받은 송 익필 과 그 형제들 , 그 자녀손들은 각자 흩어져 뿔뿔이 도망하였다. 당대를 주름 잡던 대 선생 송익필 宋翼弼 은 서인들의 영수 인 정 철 鄭澈 이나 성 혼 成渾 선생네 집에서 신세를 지며 일을 꾸몄다. 이 원수 같은 동인 들을 다 없애 버리려는 일.
정 여립 鄭汝立 사건이 , 실제로 역모가 있었는지, 조작된 사건인 지는 , 지금 와서 밝힐 수 가 없는 상태다.
처음 부터 그럴 만한 실체가 없었기 때문일 거라고 생각된다. 그런데 그럴만한 빌미를 준 것도 일부는 맞는 말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 사건의 진실 여부, 그 논란을 하려는 게 아니다.
그 사건이 진행 되는 과정이 얼마나 일방적이고 무 분별한 수사였던가 , 전신을 고문 당하면서도 진실을 말하는 사람의 변명을 들어 주지도 않는 채로 사형에 처하여 버리던 사람들,
그 때 그 사건의 특별 수사본부장을 맡았던 사람들의 그 엉터리도 없는 처사를 보고자 하는 거다.
황해도 감사의 비밀 장계 狀啓
처음으로 정여립의 역모 사실을 위에 알린 이는 황해도 감사 한 준의 비밀 장계로 시작된다.
장계라는 건 지방수령이 중앙 정부 임금님 께 업무 보고를 하는 글이다.
정여립이 멀리 전주 지역에 있었는데, 이렇게 황해도에서 고변을 하게 된 거 부터가 의아심을 갖게 되는 건데, 그게 바로 도망 다니던 송 익필이 그 때, 황해도 백천 白川 쪽에 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모라는 말에 놀란 선조는 그 날 밤으로 특별수사팀을 만들었는데, 그 당시 우의정 이던 정언신 鄭彦信 이 총책임자가 되었다. 당시에 국정을 맡은 것은 동인 들이어서 이산해 李山海 도 같이 거들게 되었다.
사건 초기에는 특별수사 팀에서 볼 때 , 정여립이 역모를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되어서 서둘지 않고 조금 동정을 살피는 중이었고, 도리어 고발한 사람들을 불러다가 진실을 캐 보려고 하던 참이었다.
마침 선조는 일반 백성들에게 " 구언 求言 교지 " 라는 걸 내렸더니, 전국에서 특별 수사본부장 정언신을 교체해야 한다는 글이 산처럼 올라 왔다. 구언 이라는 건 일반 백성들의 의견을 구한 다는 건데, 사실은 서인들의 의견이었다.
정언신 과 정여립은 가까운 집안이라는 사실을 들어서 온갖 악풀을 다 달아서 바꾸라고 요구하였다.
실제로 정언신은 정여립과 9 촌 간이라. 의심 받는 게 싫어서 자진해서 물러 났다.
그 후임에 선조는 정 철 을 임명했다.
이게 큰 화근 을 불러 오는 인사 였다는 건 그 뒤에 보면 알게 된다.
어덤덤한 선조는 뭐가 뭔지 구별을 못하고 정 철의 손에 칼을 들려 줘서 원수들을 다 죽이게 하였다.
이 사건에 연루돼서 끌려가 죽은 사람은 전국에서 천여명이 넘는다. 어떤 이들은 이천여명을 말하기도 한다.
그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그게 다 동인 들이었다.
뭐 좀 해 볼 만한 사람들은 이리 저리 연좌를 걸어서 결국은 다 죽고 유배가고 동인들의 집안은 다 죽었다.
사람같이 생긴 건 다 끌어다 죽이고 나니, 그 다음 해에 임진 왜란이 터진다.
이게 어쩌 자는 거냐 . 아니 이제는 뭐를 허자는 말이냐 .
조선의 천재이면서도 천한 노비의 소생이라 사람대접을 받지 못한 송익필 이 기획 하고 연출한 이 사건에
선조라는 임금으로 부터 모든 권력을 가진 실세들이 다 동원 돼서 , 물 불을 가리지 않고 칼을 휘둘러 대었으니,
아아, 통재로다.
나라 망할 짓을 저질러 놓고 서야 무슨 임금이고, 무슨 대신이란 말이냐.
너무나 앞서가던 천재의 비운.
정여립은 벌써 부터 천하 공물설 天下公物說 을 말하여서 천지의 만물은 한 두 사람이 가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과
그 의견에 연결 돼서 하사비군론 何事非君論을 주장하여 임금 자리를 세습 하는 걸 반대하는 말을 하였으니, 그 당시로서는 도저히 받아 들여 질 수 없는 말이었다.
그 당시에 벌써 공화정 에서나 가능한 말을 했으니, 죽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 상황을 짐작하기 위하여 몇가지 사례를 올려 본다.
김 빙 金 憑 이라는 사람의 죽음.
김빙은 문과에 급제한 지 얼마 되지 아니하여 좌랑 벼슬에 있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바람 불면 눈물이 나는 병이 있엇다. 풍현병 風眩病 이란다.
역적 정여립을 추형 하던 날 , 온 관리 들이 다 줄을 지어 서서 기다리는 데, 마침 날이 춥고 바람이 불어서
김 빙은 눈물을 닦으며 눈 아픈 걸 만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그 걸 본 사람은 김빙과 감정이 좋지 않앗던 白惟咸
이란 관료였는데 , 임금님에게 고자질을 하였다.
역적 정여립의 죽음을 슬퍼하여 울고 있다는 말을 들은 즉시 김빙은 끌려 가서 죽임을 당하였다.
본래 김빙은 정여립과 거리가 먼 사람이었으며, 눈에 안질이 있어서 그렇다는 말을 수없이 해도
아무도 들어 주지 아니하였다.
조 대중 曺 大中 의 죽음.
조대중은 全羅 都事 로 있었다.
都事 라는 벼슬은 監司 바로 밑에 벼슬이니 지금으로 치면 도지사 밑에 부지사에 해당한다.
그런데 임기를 마치고 떠나는 때엿는지 사랑하던 여인과 이별하면서 눈물을 흘린게 알려 졌다.
그 말을 들은 아무개가 얼른 고발하였다.
조 아무개는 역적 이 죽는 걸 슬퍼하여 눈물을 흘렸다고,
그 때는 서로가 먼저 고발하는 게 상책이었다.
고발하면 상을 받고 , 본인은 역적과 관련이 없다는 걸 증명 받는 길이어서 선수쳐서 고발이 최고였다.
조대중이 끌려가 고문을 받으면서 자기가 역적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걸 밝혀 줄 증인 들이 다 있다고
증인 신청을 하여도 아무도 들어 주는 이가 없었다, 그냥 사형에 처하고 말았다.
임금이라는 자리는 , 장래 유망한 젊은 이를 이렇게 억울하게 죽여도 괜찮은 가
초대 수사본부장 정언신 鄭彦信의 죽음.
정언신은 우의정이고 또 자기가 특별수사 본부장에 있으니까, 처음에 정여립의 가택수색을 하려고 금부도사를 보낼 때 단단히 부탁을 했다.
정여립의 집에 가거든 편지 주고 받은 거 전부 압수해서 가져 오기 전에 자기와 자기 형 정언지 명의로 된 문서가 있으면 다 골라 내서 없애 버리라고 말이다.
금부도사는 당연히 그렇게 했다.
정언신은 안심했고, 그간에 주고 받은 서신은 다 없어졌으니 자기는 정여립과 아무런 관계도 없다고 잡아 떼었다.
그런데 선조가 가지고 있던 그 압수 문서 들 속에는 편지 말미에 종로 신 宗老 信 , 이라고 쓴 것도 있고, 족로 신
族老 信 이라고 쓴 것도 있었고, 동곡 東谷 이라고 쓴 것도 있었다.
宗老 라고 쓴 것과 族老 라고 쓴 것은 정언신이 정여립에게 편지를 쓸 때, 집안의 어른이라는 의미로 쓴 거였고, 東谷이라고 된 것은 형 정언지 의 호를 쓴 것이었다.
금부도사는 글이 짧어서 그걸 미쳐 알아 보지 못하고 그대로 압수해다가 선조에게 주었으니, 이게 증거가 돼서 결국은
귀양가서 죽었다.
아까운 사람들의 무죄한 피흘리기를 계속하던 조선의 임금들, 아 그 결과는 어째 되는가.
광복절 75 주년에
휴전선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평지교회 흰쾨끼리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