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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은곡(隱谷) 이정선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한해식 (목포노회,목포산정교회,목사) 2020-04-24 (금) 11:05 4년전 4307  
  은곡_이정선_목사님을_떠나_보내면서.hwp (16.5K), Down : 9, 2020-04-24 11:05:40

은곡(隱谷) 이정선 목사님을 추모하면서.....

 

어제(22) 우리는 우리들의 영원한 영국신사요 휴머니스트이신 은곡 이정선 목사님을 하늘나라로 환송했다. 목포 노회장으로 진행된 장례예배에서 후배들의 말씀과 조사가 이어지고 해 같이 빛나리의 후배들의 조가를 끝으로 은곡의 육신은 승화장으로 향했다. 운구차가 도착하고 화장 절차를 밟는 동안 나는 곧 한줌의 재가 되어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은곡의 관을 싣고 있는 리무진과 압해도 앞 바다를 바라보며 망연자실했다.

 

안내에 따라 후배들에 의해 운구차에서 내려진 은곡의 관은 화장로로 이동하기 위해 옮겨진 후 노회장의 마지막 기도 후 화장로를 향해 갔다. 나는 우리의 맏형이요 아버지요 목자였던 은곡을 향해 손을 흔들며 형님 잘 가십시오오열하며 인사했다. 이제 은곡과의 이 세상에서의 인연은 여기까지였다. 나는 통곡이 절로 이어지며 필름처럼 비춰지고, 스치고 지나가는 지난날의 은곡과의 삶의 여정이 떠올라 슬픔을 주체 할 수가 없었다.

 

은곡 이정선 목사는 누구보다도 따뜻하고 온화하고 가정적인 분이셨다. 그는 횃불을 들고 사자후를 토하는 거리의 전사는 아니었다. 항상 그의 자리는 교회 공동체였고 가정이었다.

 

은곡은 깔끔하고 단아한 성격 때문에 우리는 그를 영국 신사라고 불렀다. 항상 위트와 유머로 우리를 즐겁게 하셨고 밥값, 찻값, 심지어 술값도 잘 내주시던 인간미 넘치는 휴메니스트였다. 72년 목회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전남노회를 한 번도 떠난 적이 없는 나는 항상 은곡의 이런 모습에 매료되고 감동했기에 늘 그 곁에 있었다. 그리고 맏형처럼, 아버지처럼, 의지하고 살았다. 내가 36년 전 이곳 임성제일교회에 청빙되어 섬기게 한 것도 은곡이셨다..

 

언젠가 유달산 정상에서 삼학도를 바라보며 극래야, 나도 황제가 되고 싶다.”라고 넋두리를 하셨다. 그도 목사이기 전에 한 인간이자 사람이었다. 본능과 절제 사이에서 욕망의 옷을 입고 오는 탐심과, 야망의 야릇한 불빛 속에 쫒아오는 명예를 보면서 한 시대를 풍미하며 살아가는 한 사나이였던 은곡이 내뱉는 이 말에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때도 그에게서 풍겨 나오는 인간미에 고개를 끄덕이며 형님, 우리도 황제가 되어 봅시다.”하고 응수 한 적이 있다. 운곡은 그렇게 휴메니스트였다.

 

작년 오월 나는 미국을 한 달 정도 방문 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자꾸 요양병원에 계시는 은곡이 걸렸다. 내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에 혹 돌아 가실까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1년 전의 일이다. 그래서 몇 후배들과 요양병원을 문병했었다. 그 때 정말로 속상해서 많이 울었다. 인지능력이 너무 떨어져 사람은 반기지만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셨다. 시내로 모시고 나와 갈치찜을 사드렸는데 맛있다고 하시는데 그것이 갈치찜인지를 모르시는 것이었다.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그 모습이 너무 속상했다.

 

은곡은 누구보다도 교회와 가정, 자녀들에 대해 특별한 애정을 가지셨던 것 같다. 은곡은 한때 우리교단 총회장 물망에 오르시고 그 일은 아주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은곡은 망설이셨고 포기 하셨다. 그 이유는 내가 알기로 교회와 가정을 위해서였다. 자신의 명예보다는 교회와 가정에 부담을 주기 싫어서였고 가정을 위하는 것이 우선이라 생각 하신 것이다.

 

나는 은곡의 명을 거의 거슬려 본적이 없다. 딱 한번 은곡의 명을 거스린 것이 한신학원 이사 선출 문제였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때 은곡의 뜻을 따라 갔더라면 하며 후회도 해 본다. 은곡은 당시 아들에 대한 깊은 배려를 나에게 부탁했지만 거절 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상하셨을까? 생각도 해본다. 역지사지해보아도 당시의 노회역학관계였던 같다.

 

30년 전 나는 교회를 신축하다가 과로로 쓰러지고 간질환으로 두 차례에 80일 정도를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있었다. 면역력이 떨어지고 간수치가 1000까지 올라가는 일이 있었다. 후에 들어보니 은곡은 노회와 사회에 다소 과장되게 쓸 만한 젊은 놈 하나 죽게 되었는데 살려야하지 않겠느냐?”고 호소하여 내 병실에 많은 사람들이 문병하게하시고 후원하게도 하셨던 인정과 사랑의 따뜻한 사도였다.

 

목사와 함께 있으면 불편하고 재미가 없다고 하는데 은곡 이정선 목사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편안하고 언제나 재미있고 언제나 좋고 언제나 행복했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그에게 사악함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 험난한 사바세계에 살면서 많은 정을 주고, 많이 베풀고, 한결같이, 포용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은곡은 그렇게 살면서 우리들에게 그렇게 살아야 사람들이 따라온다고 가르쳤다. 만나는 사람은 언제인가 헤어지는 회자정리(會者定離), 언젠가는 사람은 죽음에 이르게 마련인 생자필멸(生者必滅)이라지만, 우리는 은곡의 빈자리로 인해 너무나 허무함과 허망함을 느낀다.

 

은곡 이정선 목사님!

늘 꿈을 꾸고 비젼을 말하시던 은곡은 이 땅의 모든 한계와 육신의 모든 연약함을 다 초월하시고, 하늘나라에서 완전한 자유와 승리를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보장받고 그 곁으로 가셨다. 우리는 잠깐 사이에 우리 곁을 떠난 은곡을 생각하면 인간적인 슬픔과 아픔을 가늠할 수가 없다. 그렇지만 이제 마지막 작별의 인사를 우리 모두 드려야겠다. 이 땅의 많은 수고를 이제는 다 내려놓고 하늘나라에 도착하셨을 은곡을 바라보자. 하늘의 천군천사들과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이 은곡 이정선 목사를 환영하며 영접하셨으리라.

 

은곡 이정선 목사님!

정말 자랑스럽고, 존경했고, 감사했고, 정말 사랑했습니다. 뒤에 남은 가족들과 우리 후배들은 은곡을 생각하며 그 빈자리를 채우며 새롭게 일어나고 살아갈 것이다.

 

사랑합니다. 은곡 이정선 목사님! 부활의 날에 만나요.

  

2020. 4.23.

 

이극래 목사

 


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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