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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해는 제3의 길 찾아 나선 개척자'(한신대 목요강좌)

이성환 (경기중부노회,하늘품교회,목사) 2013-04-11 (목) 11:09 10년전 6109  
 
‘여해는 제3의 길 찾아 나선 개척자’
 
한신대 신대원 목요강좌 ‘여해 강원용 목사의 삶과 사상’진행
 
2013년 04월 09일 (화) 18:38:31 편집부webmaster@ecumenian.com
▲ 1977년 5월 대화문화아카데미 ㅣ 사진출처: 여해 강원용목사 사이버 아카이브
한신대학교 신학대학원(원장 강성영) 2013년도 봄 학기 목요강좌가 진행 중이다. 주제는 ‘여해 강원용 목사의 삶과 사상’이며 지난 3월 21일 김경재 교수(한신대 명예교수)의 “여해 강원용목사와 한국사회 속의 교회”라는 제목으로 시작됐으며 박경서 박사(이화여대 평화학연구소장), 안재웅 박사(YMCA 전국연맹이사장)의 여해의 에큐메니칼 운동에 관해 강연을 진행했다. 앞으로 법륜 스님, 이강백 교수, 윤여준 전 환경부장관, 신인령 전 이대총장이 강사로 나선다.
▲ 김경재 교수(한신대 명예교수)
첫 번째 강좌를 맡은 김경재 교수는 “함경도 백두대간의 산골마을 농가에서 태어나 청소년기까지 장남으로 농사를 도왔던 여해의 삶의 밑바탕에는 민중의 고단한 삶이 깔려있다.”고 평하면서 강원용 목사의 청렴했던 삶을 주목했다.
 
여해 “순대국 먹어도 됩니까?” 장공 “없어서 못먹지”
 
김 교수는 1935년 용정중학교에 입학한 강원용 목사가 장공 김재준 목사와의 조우를 통해 그의 삶의 변화를 맞이하게 되는 일화를 소개했다.
여해는 당시 아주 전통적 문자적이고 보수적 신앙에 갇혀있던 학생이었는데 장공을 만나 그것이 깨지는 과정을 겪는다. 중학시절부터 카리스마 대단해 학생회장과 종교부장을 맞아 리더십을 발휘했다. 스트라이크도 여러 차례 하면서 선생들을 골탕 먹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하루는 장공에게 “순대국 먹어도 됩니까?”라고 물었고―평소 여해는 구약에 고기를 피와 함께 먹지 말라는 구절을 지키느라 순대국도 안 먹었다고 한다.―장공의 “없어서 못 먹지”라는 대답에 새로운 신앙의 눈이 열리며 여해의 신앙관이 새로이 정립되고 진보적인 기독청년으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을 겪었다
 
▲ 만주 용정의 은진중학교 시절에 용정의 한 국숫집에서 국수를 먹는 강원용 목사.
김 교수는 경동교회의 설립자에 대해서도 확실히 하고 넘어갔다. “정론은 아시는 대로 영락교회 한경직, 성남교회 송창근, 경동교회 김재준이 미국 프린스턴에서 만나 도원결의 후 각각 교회를 설립했다. 경동교회(당시 야고보 교회)는 당시 김재준 목사가 세운 것이 명백하지만 장공은 당시 교편을 잡고 있어서 당시 목회자 신분이 아닌 여해가 청년들을 조직하며 교회를 성장시켰고 1948년 한신대학교(당시 조선신학교)졸업 후 목사 안수를 받은 이후 1949년에야 당회장을 물려받게 된 것이다.”라며 경동교회의 약사를 설명했다.
 
 
라인홀드 니버, 폴 틸리히 그리고 장공
 
김경재 교수는 여해의 신학사상을 완성시킨 스승으로 장공 김재준과 라인홀드 니버, 폴틸리히를 꼽았다. 그의 웅변적 설교 속에 녹아있는 기독교의 본질을 놓치지 않고도 그리스도 복음의 심원성을 강조하는 사상은 세 사람으로부터 수혈을 받은 것이라 해석한다.
 
▲ 왼쪽부터 라인홀드 니버, 폴 틸리히, 장공 김재준
유니온 시절 폴 틸리히 교수와의 만을 통해 ‘인간의 상황은 질문하고 그리스도의 영원한 복음은 위로부터 메시지로 주어지는데 이 두 개가 만나 충돌하면서 나는 스파크가 바로 인간현실이고 신학이다.’라는 ‘상관의 방법’을 통해 상황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폴 틸리히 사상의 밑바닥에 있는 하나님의 본성인 사랑과 죄의 본질이 분리와 소외임을 깨달아 사랑은 소외를 극복하고 재결합하는 구체적인 실천임을 깨닫게 되었다,
 
김 교수는 또 ‘여해는 라인홀드 니버로부터 기독교현실주의의 영향을 받아 제3의 길, 양극단 사이의 좁고 험한 길을 선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원죄는 인간의 자기중심적 이기심에서 비롯되는데 하나님의 뜻에 순종도 배신도 가능한 양면적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낙관적 유토피아나 비관주의 비판하고 100%선한 삶은 불가능하지만 최선의 선을 추구하고 삶을 노력해야하며 그러기위해서는 힘을 조직하고 집단 간의 정의를 통해 간접적으로 현실화하는 길을 찾아 여해는 제3의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between and beyond’
 
마지막으로 김 교수는 여해의 삶을 총평하면서 그가 한국사회와 교회에 남긴 점을 몇 가지로 요약했다.
 
첫째는 열린 개혁파 교회의 개척자로서 그 정신을 추구하고 노력했다는 것이다. 창조세계 전 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이 막힘없이 실현되기 위한 기독교의 사회적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장로교 본질을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둘째는 기독학생운동과 에큐메니칼 운동의 선구자였다. 특히 대화문화아카데미를 통해 급변하는 한국사회에서 폭발하는 사회적 갈등을 대화로 해결하려고 했던 점이다. 김 교수는 “크리스찬아카데미는 개신교 교육기관일 뿐이고 여해는 개신교 목사일 뿐인데 역대 한국의 대통령치고 거길 안다닌 사람이 없다.”며 여해의 천부적이고 천재적인 설득력과 용인술, 카리스마적 지도력을 평가했다.
 
김 교수는 여해가 말한 대화란 ‘between and beyond’이라며 대화에는 두 가지 변증법 대화와 대화적 대화가 있다고 설명했다. 대립하는 집단 간의 대화를 고양시켜 제3의 길을 이론과 실천으로 추출해내는 변증법적 대화와 제3의 길까지는 안가도 좋고 오해 때문에 생기는 감정의 골을 메우고 서로를 알아가는 대화적 대화를 설명했다.
 
김 교수는 “알렌스키의 조직 이론을 통해 활동했던 오재식 선생의 입장에서는 강 목사의 대화법이 너무 부드러운 것일 수 있다. 7,80년대 당시는 약자의 상황에 매우 열악했기 때문이다.”라며 강원용 목사의 방식에 대해 비판이 있었다는 점 또한 상기시켰다.
 
▲ 1953년 8월 휴전 직후 오재식은 기독학생회의 지도자인 강원용 목사(맨 오른쪽)의 갑작스러운 캐나다 유학 선언에 분노해 대놓고 맞서기도 했으나 만류하지는 못했다. 사진은 강 목사가 캐나다를 거쳐 뉴욕 유니언신학대학을 마치고 57년 귀국길에 오른 공항에서 환송을 받는 모습이다. 여해강원용목사아카이브 제공
김교수는 “기본적으로 강원용 목사의 절대선, 절대 악이라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입장은 많은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자신의 신념을 갖고 최선을 다했다.”고 말했다.
 
김 교수는 그러한 부분에 대해 “강 목사는 자기 할 일은 그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김재준의 삶과 철학과 다를 수 있었다. 장공은 상대적인 선 쪽에 분명히 서야하고 그에 따른 고통을 감수했다. 그래도 강 목사는 그 입장을 충분히 이해했고 장공이 고초를 겪을까 노심초사하기도 했다.”고 회고했다.
 
김 교수는 여해의 신학적인 배경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며 앞으로의 강좌에 참고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강좌를 마쳤다.(강연동영상 : http://dept.hs.ac.kr/gsth/ )

이상호(대전노회,공주세광교회,목사) 2013-04-12 (금) 08:38 10년전
좋은 자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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