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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링컨>과 예수의 게세마네 기도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눅22:39-46)

최병학 (부산노회,남부산용호교회,목사) 2013-03-24 (일) 10:20 11년전 5810  
<고난의 십자가Ⅲ>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눅22:39-46)
 
오늘은 종려주일이다. 예수께서 초라한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셨던 날이다. 그리고 게세마네 또는 감람산(올리브 산)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의 길을 피하고자 번민하셨던 밤이 다가온다. 철저히 사적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짊어지기 싫었지만, 공적으로 그 사명을 감당한 번민의 밤이 다가오는 것이다. 공(公)과 사(私), 그리스 시대는 ‘폴리스(polis)’와 ‘오이코스(oikos)’인 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에서 예수의 고민은 무엇이었는지, 그리스 시대의 상황과 영화 <링컨>에서 링컨의 상황과 연결하여 살펴보자.
 
1. 오이코스와 폴리스의 분리
 
고대 그리스인들의 생활은 ‘폴리스(polis)’와 ‘오이코스(oikos)’의 생활로 나눈다. 폴리스는 우리말로 ‘공적영역’이며 오이코스는 ‘사적영역’이다. 따라서 폴리스에서는 공적인 토론과 결정이 이루어지고, 이곳에서 사람들은 말과 품성으로써 자기를 드러내고 상대방을 설득한다. 그러나 오이코스는 욕구와 필요의 영역으로 사적 살림살이의 영역이다. 곧, 생명을 유지하고, 종족을 보존하는 데 필수적인 양육과 출산, 경제적 생산이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는 폴리스(공적인 것)와 오이코스(사적인 것)를 엄격하게 분리한다. 공적인 것을 다루는 원리와 사적인 것을 다루는 원리는 서로 다른 것이며, 또한 사적인 영역보다 공적인 영역이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폴리스는 시민들의 공론장이고, 오이코스는 여성, 아이, 나그네, 노예들의 생산 영역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폴리스에 속하는 것’과 ‘오이코스로 배제되는 것’은 한 사람의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인 “인간은 폴리스(정치적, 사회적)적 존재”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차원에서 이해된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공화주의의 현대적 대표자인 한나 아렌트(H. Arendt)는 오늘날 로마 공화주의의 영향으로 인해 폴리스와 오이코스의 영역 분리가 점차 해소되었음을 지적하고, 공적인 것의 우위가 사라진 시대가 됐다고 한탄한다. 아렌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이 “파도처럼 끊임없이 서로 뒤섞였다”는 것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만약 고대 그리스에서 누군가 자신의 가정 문제(오이코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적 영역을 활용한다면(폴리스에 참여한다면) 비난을 면치 못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사회는 대부분의 공적활동이 사적 이해관계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지난 5년간 우리는 한 기업가가 정치가가 되어 폴리스와 오이코스를 뒤섞어 사적 영역의 장으로 정치를 타락시킨 것을 보아왔다.
사실 정당들은 각종 이익집단들을 대변하는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아렌트는 공공적인 것의 우위 속에서 ‘정치 사회’와 ‘경제 사회’를 분리하고, 정치 사회를 ‘덕성 있는 시민들’이 이끌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공적영역을 가리키는 폴리스는 ‘정치(politics)’의 어원으로, 사적영역을 가리키는 말인 오이코스는 ‘경제(economy: oikos+‘경영, 관리, 법’을 뜻하는 nomos의 결합)’의 어원이 된다. 따라서 문제는 ‘경제와 정치의 관계’ 설정이다. 사적 특성을 본질로 하는 경제가 공적 특성을 본질로 하는 정치의 영역에 들어와 정치를 마비시키는 것이 문제이다. 사실 정치의 영역은 다원성의 영역이며, 정치의 묘미는 다른 생각과 의견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도록 조화를 이루는 예술이다.
 
그러나 경제는 인간을 ‘욕구를 가지고 이익을 추구하는 단일한 특성을 가진 존재’로만 여기기에 정치와 경제는 정반대의 특성을 가진다. 이 둘이 섞인다면 욕망에 바탕을 둔 힘센 경제가 겉으로 보기에 소모적인 정치 곧, 말 많고, 탈 많고, 생각할 것 많은 정치를 빠른 속도로 잠식할 수 밖에 없다. 사실 현재 사회는 모든 것이 경제 논리, 곧 돈의 논리, 맘몬의 논리로 해결이 되고 있지 않은가!
 
우리말 공직자(公職者)란 ‘공익을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이지, ‘공직을 이용해 사익을 추구하도록 허락받은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한국 사회에는 경제지상주의가 사회의 전 영역을 지배하고 있고, 공직자들은 공과 사를 구분하기는커녕 공직을 통해 사적인 이익을 취하고 있으며, 법을 잘 아는 이들은 자신들이 유능함을 이용하여 자신들에게 유리한 세상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고위공직자 인사 청문회에 나타난 이들을 보라. 오이코스로 폴리스를 농단한 자들의 씁쓸한 초상을 뻔뻔하게도 부끄럼 없이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2. 영화 <링컨>: 폴리스와 오이코스의 조화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링컨>(Lincoln, 2013)은 공적인 영역과 사적인 영역에 대해 또 다른 생각을 던져준다. 영화가 시작되면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2년의 게티스버그를 비춰준다. 사방이 전쟁의 포화로 뒤덮이고 둘러싸인 전장의 한 복판, 남루한 막사에 대통령 링컨이 사병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있다. 한 흑인 사병은 자신이 왜 군에 입대하였는지, 그리고 대통령을 얼마나 존경하는지, 또한 흑인들도 장교가 될 수 있는 길을 보장해 달라고 요구한다. 링컨은 이들의 말을 다 듣는다. 사적영역이 공적영역에 침투한 것이다. 노예해방이야말로 말 그대로 오이코스의 또 다른 폴리스화가 아닌가!
 
장면이 바뀌고 카메라는 백악관과 링컨의 집무실을 비춰준다. 여기서 참모들은 자신의 의견을 맘껏 피력하고 대통령인 링컨은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그리고 링컨은 자신과 다른 의견에 대하여 하나 하나 짚어가면서 설득과 논증을 통해 합의점을 찾아 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전형적인 공적영역, 곧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의 모습이다.
 
 
다시 카메라는 링컨의 아내와 아들이 있는 응접실과 침실을 비춰준다. 이곳은 전형적인 사적영역이다. 아내는 링컨에게 불평을 털어놓고, 아들은 아버지 링컨에게 책을 읽어달라고 조른다. 링컨은 자신의 일을 잠시 멈추고 아이를 위해 책을 읽어 준다. 다정한 남편이자, 자상한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처럼 영화는 공적영역과 사적영역에서 최선을 다하는 주인공 링컨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오늘날의 위기는 경제가 정치를 잠식한 위기이기도 하지만, 가정의 위기이기도 하며, 가장 큰 가정인 지구촌의 위기이기도 하다.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의 집(oikos)’의 위기이다. 사실, 생태(ecology)라는 말도 오이코스에서 유래했다. 지금 하나님이 지으신 집, 즉 우리와 다른 모든 생명체의 삶의 공간이 인간의 탐욕으로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오이코스를 더 크게 보아야 한다.
 
사적영역인 오이코스(oikos, 집, 주거)에서 오이쿠메네(oikoumene), 곧 ‘사람들이 들어가 살 수 있는 땅’, 혹은 ‘사람이 사는 땅’, ‘세계 전체의 거주민’이라는 말이 나왔고, 여기서 영어 에큐메니컬(ecumenical)이라는 단어가 파생된다. 따라서 사적영역인 오이코스를 확장하여 ‘세계 전체의 집’으로 생각하는 것이 에큐메니컬 운동이다.
 
오늘 예수의 기도도 바로 그러하다. 오이코스의 사적인 영역은 배제하고, 차라리 오이코스를 더 크게 보아, 폴리스의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의 의미를 깨닫고 그 고통스러운 길을 걸어가셨던 예수의 결단이다.
 
3. 예수의 감람산 기도: 폴리스를 감싸 안으려는 오이코스의 자기 부정, 혹은 더 큰 오이코스로의 사명
 
4복음서는 모두 최후의 만찬 후 그리스도가 제자들을 데리고 동산에 가서 기도를 드린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 장소가 게세마네 또는 감람산(올리브 산)이다. 예수는 이곳에서 다가오는 수난의 죽음을 슬퍼하며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기도하였다(눅22:44). 그러나 제자들은 그 사이 유혹에 빠져 잠이 들어버렸다.
 
게세마네 동산에서 예수의 기도는 첫째, 공적영역을 감당하려는 사적영역의 자기 부정이다. 사실 십자가야 말로 폴리스를 위한 오이코스의 자기 부정이 아닌가!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눅9:23-25).” 공적 영역을 감당하려면, 예수를 따르려거든 사적 영역을 부정해야 한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하는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누가복음은 더 극단적으로 나아간다. “무릇 내게 오는 자가 자기 부모와 처자와 형제와 자매와 더욱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26-27)” 오이코스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폴리스의 영역에, 곧 예수의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6:14).”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게세마네 기도의 둘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더 큰 오이코스의 발견이자, 그것을 감당하는 사명이다. 오이코스를 부정하여 폴리스의 사명을 감당했지만, 그 부정은 더 큰 오이코스의 발견이다. 베드로는 말한다.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벧전2:24)”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므로, 그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나음을 얻은 것이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된 것이다.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것은 오이코스를 개인의 사적 영역으로 한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전체의 거주민으로, 나아가 전우주적으로 확장하여 인류와 세상을 위한 대속의 죽음으로 감당하신 것이다.
 
이사야도 이것을 잘 예언하였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4-6).”
 
따라서 십자가야말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더 큰 오이코스의 상징이 된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5:21).” 이러한 십자가의 길을 가기 위해 예수의 감람산의 기도는 첫째, ‘습관을 따라하는 기도’이다(눅22:39). 이것은 사적영역인 오이코스의 영역에서의 성실함을 보여준다.
 
둘째, ‘유혹에 빠지지 않으려고 기도’한다(40). 이것은 사적 영역을 공적 영역으로 투영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예수는 기도한다.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42)”고 기도한다.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각을 따르려는 것이다.
 
셋째,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는 기도’이다(46). 이것은 공적 영역을 사적 영역으로 바꾸지 않으려는 것이다. 철저히 자신을 비우고, 더 큰 오이코스를 발견하고 그것을 감당하려는 기도인 것이다.
 
4. 결론
 
장 지글러가 쓴 책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갈라파고스, 2007)는 현재 세계에서 굶주려 죽는 사람이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고 있음을 잘 보여준다. 전세계에서 8억 2천만명이 심각한 기아 상태에 놓여있는데, 이는 세계 인구의 1/6이 굶어죽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10세 미만의 아이들은 5초에 한명 꼴로 기아로 죽어가고 있다고 한다.
 
아프리카에서는 매년 16만 5천명의 여성이 아이를 낳다가 영양결핍에서 오는 저항력 부족으로 죽는다. 그러나 전 세계 옥수수의 1/4을 부유한 나라의 소들이 먹어 치운다고 한다. 그리고 그 소를 부유한 나라 사람들이 먹는 것이다. 부유한 사람들에게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소는 옥수수로 배를 채우고, 가난한 나라 사람들은 굶어 죽어 가고 있는 것이 지구촌의 현실이다.
 
예수의 게세마네 동산의 기도는 오늘 여기서 이렇게 우리들에게 되묻고 있다. “폴리스를 감싸 안으려는 오이코스의 자기 부정, 혹은 더 큰 오이코스로의 사명을 너는 갖고 있냐?”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물음 앞에 링컨은 자신의 공적, 사적 영역에서 성실히 최선을 다했고, 지금 우리에게도 그 물음은 여전한 것이다.
 
오늘 가정인 오이코스에서 여러분은 어떤가? 나아가 폴리스인 교회와 직장에서는 어떤가? 오이코스에서 성실하며 폴리스에서 공적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가? 그리고 오이코스의 이익을 폴리스에 투영하지 않게,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는가? 또는 폴리스의 영역을 오이코스로 가져가지 않도록,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는가!

최병학(부산노회,남부산용호교회,목사) 2013-03-24 (일) 10:23 11년전
사순절 설교 주제 '아버지-아들-십자가 고난-부활' 시리즈3탄 '십자가의 의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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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자은(경기노회,평화교회,목사) 2013-03-25 (월) 20:30 11년전
목사님! 폴리스와 오이코스의 조화를 말씀하시며 더 큰 오이코스로의 사명을 향한 종려주일메시지에 깊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끊임없이 오이코스의 자기부정과 함께 더 큰 오이코스의 사명에 늘 부족하기만한 저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려고 다짐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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