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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구 목사님의 질문에 대한 독후감

강현 (기타,,신도) 2013-02-24 (일) 03:03 7년전 3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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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외로군요. 제가 만약 정인구 목사님이었다면 제게 이런 질문과 문제제기를 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교회파괴분자로 추측되는 사람에게 발언기회를 일부러 주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혹시 저 교회파괴분자를 전도해서 새 사람을 만들거나 아니면 끝장토론으로 묵사발을 만들어서 다시는 이 게시판에 얼굴들고 나타나지 못하게 하기 위한 기회를 마련해 보고자 하셨다면 의도자체가 그다지 생산적인 것 같지는 않습니다.
초월적 진리를 추구하는 행위와 사색은 설득이나 승리를 목표로 한 토론과 논쟁의 대상으로 삼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그런 행위와 사색이 일정한 집단적 경향성을 보일 수는 있지만 노선의 문제도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 나눔의 글을 올렸는데 님은 그것을 논쟁을 유발하기 위한 신학적 도발로 받아들이셨다면 유감입니다.  
저 사람의 사고는 왜 나와 다를까, 그것이 궁금해서 정식으로 질문하셨다면, 빙고!
얼마든지 우리는 자유롭게 대화를 나눌 수 있습니다.
저는 종교라는 단어를 떠 올리면 즐겁고 신나고 재미있다는 느낌이 먼저 떠오르는데, 어떤 분들은 고뇌, 눈물, 경건, 아픔 같은 것이 주제인 모양입니다. 암튼 좋습니다. 느낌과 코드가 달라도 얼마든지 대화 나눌 수 있습니다.   
다만 한 가지 부탁드릴 게 있습니다.
님도 그렇고 님이 인용하신 어떤 교역자도 그렇지만, ‘자유주의 신학을 운위하면서 우리도 예전에 다 그런 것을 공부했고 경험했다는 식의 표현만큼은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것은 마치 얼치기 사상전력을 가지고 있는 노인이 나도 과거에는 막시스트였는데 철이 들자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자유민주주의자가 되었다는 식의 넋두리를 듣는 것 같아 민망합니다.
과거에 막시스트였다는 그 노인은 아마도 자본론의 서문조차 읽어본 적이 없었을 것이고, "자유민주주의자가 되었다" 는 지금은 시장경제최선을 다 하는 우주적 개체로서의 인간이 내포하는 철학적 본질간에 어떤 관계가 있는지 표피적 고민조차 별로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학습과 사유의 체계를 제대로 구축한 사람이라면 인식의 단계를 그런 식으로 분류해서 자기의 영적 과거를 회상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이 도대체 무엇인가요? 성서비평학을 수용하는 신학을 의미하나요?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주제가 성서비평입니까? 그런 건 님들이 과거에 다 겪었다는 1980 년대가 아니라 1920 년대에 다 끝난 거 아니었나요?    
질문에 보면 성서는 비평대상이 아니라고 하셨는데 혹시 비평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계신 건 아닌가요? 비평이란 대상을 올바로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과정 그 자체입니다. 인간은 비평없이 성서건 뭐건 아무것도 제대로 인식할 수 없습니다.  
암튼 저는 지금 새삼스럽게 성서비평같은 건 할 생각 없습니다. 바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총론적으로 빨리 빨리, 가급적 짧게 이야기 하겠습니다.
부활이 신앙이냐 신화냐, 이렇게 질문하셨는데, 이 질문은 다음과 같이 바꾸어야 의미있는 질문으로 성립할 수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부활체험은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었으며 현대인들에게 그 사건은 어떻게 재해석되어질 수 있는가,,, 라고 말이죠.
이런 문제들에 대해 탐구하고 설명하는 것이야말로 신학의 사명 중 하나일 것 입니다. 사실 부활사건 체험은 그때까지 유대인들이 가져왔던 신관이, ‘예수라는 사나이의 삶과 죽음을 통해 투영된 하나님의 새 본질로 인해 혁명적으로 바뀐 계기가 되었는데, 새로 투영된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놓고 토론하는 게 이 주제의 핵심입니다.  
이런 부분들을 설명하시는 것이 교역자들이 하실 일이지요. 다짜고짜 신자들에게 사상검증하듯 부활이 신앙이냐 신화냐 라고 질문하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는 일 입니다.  
그런 류의 질문은 당연히 생물학적으로 사망한 예수가 다시 소생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하늘나라로 날아갔다는 것을 historical fact 로 믿느냐 아니냐 라고 질문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류의 질문때문에 한기총류에 속한 사람들과 반기련류에 속한 사람들이 얼토당토않은 말도 안되는 소리들을 둘러싸고 한심한 말싸움을 반복하고 있는 것 입니다.
그런 류의 질문을 토론 주제로 삼는다면 기독교 경전을 단 한 줄도 읽지 않은 사람이 나타나서 자기 멋대로 조롱하고 공격해도 교회는 단 한 마디의 반론다운 반론도 하지 못한 채 동어반복적인 주문만을 중얼거리다가 그 자리에서 무너지고 말 것 입니다.
거기다가 진화론이냐 창조론이냐 하는 질문까지 덧 붙인다면 더 점입가경이겠지요.     
북미와 유럽의 교회들이 부활신앙과 창조신앙을 가르치지 않아서 몰락했다고요?
잊으셨나요. 남코리아 교회역사는 200여 년에 불과하지만, 북미-유럽 교회 역사는 유대교까지 합치면 6 천 년까지도 늘려 잡을 수 있습니다.
부활신앙과 창조신앙을 가르치지 않은 게 아니라 더 이상 가르칠수 없다는 것을 교회 스스로가 자각한 것 입니다. 그 자각이 소극적이나마 처음으로 교회기관의 공식적인 의사로 표현된 것이 지금으로부터 51 년 전인 1962 년부터 1965 년까지 네 차례에 걸쳐 열린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였습니다.
기독교대중이 비록 사망선고를 받은 옛 교회는 떠났지만 The Ground of Being 을 추구하는 초월적 탐구가 중단된 것은 천만에 아닙니다. 불과 수 십 년 지났는데 서구 기독교 자체가 몰락한 거라고 단정하는 것은 속단입니다.
결론과 만족이 누군가에게 의해 이미 만들어져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4 세기적 신관이 인류에게 남겨놓은 가장 큰 해악은 역시 진리 문제를 단순교리화하여 인간의 상상력과 비평능력을 마비시키고, 무엇보다 인간을 아주 spoiled 한 영적 게으름뱅이로 만들었다는 사실일 것 입니다.


정인구(경기중부노회,,목사) 2013-02-24 (일) 05:58 7년전
질문에 대한 답이 명확하지 않으시군요. 강현님의 글에 토론 또는 다른 어떤것을 말하는 글귀가 있어서 검증이 아닌 님의 대답을 듣고 싶었는데 정말 잘 빠져 나가십니다. 님과의 짧은 대화를 통해 알게된 사실은 님은 신앙의 이야기 또는 기독교의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서있는 자리는 신앙이나 기독교의 자리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다른 자리에 서서 남의 집 불난것 구경하듯이 그렇게 바라보고 재미있게 사시는 분인것 같습니다. 나는 최소한 신앙의 자리에 서서 자신의 신앙을 시대에 비춰 보시는 분이라는 대단한 오해를 했습니다. 최소한 그것은 안되는것 같군요. 님의 말씀처럼 우리들 대다수, 어쩜 이 땅에 있는 수많은 그리스도인들 대부분은 님의 주장같은 4세기 신앙관에 머물러 있는지도 모릅니다. 도대체 4세기 신앙관이 뭘 말하는지요. 전혀 생소한 용어군요. 21세기나 아니면 한참 더 앞서서 25세기쯤의 앞선 시대를 살아가시는 님과의 대화의 무가치함을 다시한번 느낍니다. 나는 님의 개종... 말도 안되는 표현이군요. 변화, 설득... 뭐라 말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한 것에 분노하지만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합니다. 질문에 대한 답변을 제대로 하시기를 바랍니다. 님의 주장의 반복이 아닌 답변을 원했던 것인데 님의 반복된 주장을 보면서 과연 이분에게 답변의 의지는 있는지, 이분의 답변을 듣는다 해서 주장과 뭐가 다를까 싶습니다. 님과 나의 자리는 다릅니다. 본인의 자리가 기독교의 자리가 아니라면 굳이 교단의 게시판에 와서 이렇게 하실 필요성이 있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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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기타,,신도) 2013-02-24 (일) 07:00 7년전
대화하기 힘든 상대는 자기의 관점만이 확고부동한 진리라고 믿고 있는 사람입니다. 정인구 목사님은 애당초 대화나 토론할 의사없이 질문 포스팅을 올렸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상대가 기독교 신앙의 자리에 서 있지 않다는 규정을 내리는 무모함이 님에 대한 모든 것을 잘 말해 주고 있습니다.

자기가 멋대로 내린 결론을 가지고 상대에게 기독교인이 아니니까 교단게시판에서 떠나는게 좋겠다고 하시는데, 님과 같은 사고방식이 대한민국의 대표적 진보교단에서 보편적으로 통하는 모습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진보란,, 민주화 운동이나 ecumenism 같은 행적/방향이 그 개념가치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라, 소통과 탐구를 향해 제한없이 열린 자세가 마련되어 있을 때 때 비로소 그 개념을 이름으로 얻을 수 있는 자격이 획득되는 것 입니다. 솔직히 저는 지난 며칠간 제 글에 반응을 보여주신 대부분의 교역자들에게 소통의 장막이 존재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비단 님 뿐 만이 아니구요.

저까지 거기에 장단을 맞추어 polemical arguments 를 유발함으로써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니까 님도 소통할 의사가 전혀 없으면서, 쓸데없이 남의 이름 거론해서 질문 운운 하며 공연한 분란을 야기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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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휘(전북동노회,전주소망교회,목사) 2013-02-24 (일) 08:00 7년전
강현님의 글들을 읽다보면 일부 공감하는 부분들도 있습니다만 은근히 그 중심의 마음이 무엇일까 궁금하게 만듭니다. 강현님이나 그에 동조하는 분들께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말씀드리고 싶군요. 이 글은 잠시 댓글을 올렸다가 내리고 수정하여 다시 올린 것입니다. 이렇게 한 것은 논리의 선명성을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곳 게시판은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신앙인들의 게시판입니다. 어떤 글이나 주장이든 그 자리에 맞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곳 게시판에서 진지한 태도로 신앙을 논하고 삶을 논하기 보다는 기독교의 신앙의 근간을 흔들거나 위협하는 일들은 지나치다 못해 경솔한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강현님의 주장은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라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몇 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강현님의 해석에 문제가 있습니다. 혹시 이단이 왜(이유,원인) 생기는지 아시는가요? 성서본문의 본래 의도에서 벗어나 달리 해석함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님은 뱀 덕분에 인간이 드디어 이성적 자아를 사용할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이성의 근원이 뱀으로부터 비롯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적 자아를 가지게 되었다고 말함으로써 뱀의 덕분에 야만적 무의식의 세계에서 이성적 자의식의 세계로, 영적단계로까지 도약할 수 있었다고 했습니다. 이는 창세기의 내용을 자의적 해석으로 아주 해괴하게 만든 것입니다. 창세기가 말하는 본래 의도는 하나님을 거스리는 탐욕과 불순종으로 이끌린 자아가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뱀의 말을 듣고 보니 보암직하고 먹음직하여 결국 하나님께서 금한 열매를 먹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영적단계로의 도약이 아닌 것입니다. 설마 “영적”이란 의미의 개념을 모르고 논한 것은 아니겠지요?

둘째, 강현님 글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마치 기독인들 모두가 뱀을 함부로 말하는 것을 전제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으나 모두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사고의 범위가 님 역시 주관적 견해로써 갇혀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기독인에 대한 인식에 있어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독인들은 모두가 뱀을 부정적으로 논하며 함부로 대한다는 인식의 사고를 버리셨으면 합니다. 성서에서도 뱀을 부정적으로만 언급하질 않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마10:16)을 보면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뱀의 지혜를 언급합니다. 그래서 뱀처럼 지혜로운 자가 되라고 합니다. 이는 뱀을 통하여 지혜를 배우라는 의미입니다. 때문에 기독인들은 님의 생각과 주장처럼 그렇게 사고에 있어서 집단적 폐쇄주의자로 살아가진 않습니다.   

셋째, 강현님은 기독인들이 오감(five senses-五感)을 통하여 아집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좀 이상한 무리들이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일반화시켜 말하고 있습니다. 지나치고 과장된 표현이 아닌가요? 그리고 뱀을 얘기하면서 영성의 단어를 사용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살아가는 기독인들은 오감에 사로잡혀 살아가는 존재들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기독인들은 오감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감 외에 영감을 아주 소중히 생각하고 영감을 따르며 살려고 노력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변화되고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 온전하게 살아가려는 자들은 영감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비록 그렇게 살아가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부족함을 알고 회개를 통하여 끊임없는 변화를 추구하고 그리스도의 온전함에 이르려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따라서 오히려 기독인은 일반적인 세상 사람들보다 아집에 사로잡힌 자아를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기독인은 인간이 육감(six senses-肉感아닌 六感)을 가지고 인지하고 대응하며 관계를 맺고 삶을 영위해 나간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는 아실 것입니다. 물론 인간이해에 있어서 다양한 견해를 제시할 수는 있으나 이러한 성서의 이해는 인간관계 속에서, 역사 속에서, 모든 피조물과 그 세계의 관계 속에서, 나아가 우주적 차원의 삶 속으로까지 확대된 참인간의 자기 모습을 지니고 살아가도록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앙은 fact라기보다 confession이라는 것을 이미 목사님들도 다 압니다. 새삼스레 그런걸 목사님들께 가르치려 안하셔도 됩니다. 단지 목사님들은 이 confession을 fiction처럼 언급하는 현상에 대해 그렇게 반응한 것입니다. 기장목사님들의 신학적 수준은 그렇게 님의 생각처럼 얕은 것이 아닙니다. 강현님의 글에 담긴 의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부정과 도전, 파괴는 발전과 창조를 이뤄내는 좋은 에너지가 되지만 잘못된 부정, 도전, 파괴, 애정이 결핍된 비난 등은 미처 깨닫지 못한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리도록 만든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강현님은 세상에 많은 선한 기독인들(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을 만나보셨습니까? 그들의 삶의 노래를 들어본 적은 있습니까? 님의 말처럼 늘 그렇게 고난과 경건만을 추구하진 않습니다. 고리타분한 정신세계와 생활태도를 지닌 기독인의 모습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이렇게 설명을 덧붙이는 것입니다. 교회의 절기에 따른 생활을 보면 사순절과 고난주간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고 묵상과 기도를 통한 깨달음의 경건한 삶(관념론적 체계 속에 갇혀버린 삶이 아닌 그리스도의 고난이 삶에 체득화되는 경건)을 갖고..., 부활절은 어둠의 세력(불의)에 대한 승리의 축제로 기뻐하며, 감사절엔 감사함으로 나누고 함께 기뻐하는.., 창조절엔 이 아름다운 창조의 세계를 감사하며 잘 보전할 것을..., 성탄절은 인간과 이 세상을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며 감사드리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요즘엔 사순절이군요. 사순절에 맞게 비춰지는 기독인의 모습은 당연한 것입니다. 말이 많았습니다. 대화를 하다보면 나와 같지 않음에 분노하실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아~! 그렇구나! 있는 그대로 인정하시면 됩니다. 다만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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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기타,,신도) 2013-02-24 (일) 08:41 7년전
제 말이 그 말 입니다. 분노할 필요는 없는 것이지요. 아~ 그렇구나 하면 되는 것 입니다. 뱀 이야기는 논문이 아니라 덕담입니다. 토론 대상으로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전통 기독교의 일반적 뱀관에 대해 말히는 것은, 뱀에 대한 모든 기독교인들의 인식을 하나로 일반화 한다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 입니다. 일반화의 오류란 그런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요. 그렇다고 일반화의 오류에 대한 조금의 오해라도 회피하기 위해 새해덕담에다 “사실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고,, 어쩌구 하는 사족을 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뱀 이야기는 널리 알려진 신화적 스토리와 이미지를 역으로 뒤바꿔어 놓은 것인데, 그것은 마치 예수의 전기비슷한 것을 서술하고 있는 복음서와 나중에 발견된 예수의 어록이 내포하는 종교적 의미의 상이성만큼이나 그 차이가 역설적이어서 재미있는 덕담이 될 수 있겠다 싶어 설날 기념으로 올려 본 것 입니다. 이병휘 목사님은 뱀 이야기를 잘 설명해 주셨지요.

어느 종교학자의 견해에 의하면 이단을 지칭하는 영어단어가 원래는 heresy 였다가 약발이 다하자 cult 라는 단어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 일까요? 약발이 다 해서 용어를 바꾸어야 할 지경이 되었다는 것은 이단이라는 말이 그 사회에서는 더 이상 합리적 설득력이 있는 단어로 기능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뜻이 됩니다. 이단은 그 한자어의 어의에 관계없이 ‘정통’ 이라는 단어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사용되어져 왔습니다.

정통과 이단의 차이는 그 가치의 옳고 그름을 대변한다기 보다는 권력이 부여되어 있느냐 여부에 촛점을 맞추는 것이 더 유용하겠습니다. 이단은 해석이 자의적이라고 하셨지만, 정통이든 이단이든 해석이란 족보에 관계없이 모두 자의적인 것 입니다. 정통 쪽에 보다 강력한 제도적 공인성이 존재한다고 해서 그 의미가 크게 달리지지는 않습니다.

자의적인 해석이 정통이 되느냐 이단이 되느냐는 그것이 진리이냐 아니냐에 따라 나뉘어진다기 보다는 그 시대조류가 대변하는 주류가 무엇을 선택하느냐를 포함한 복합적인 파워의 향배에 따라 정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렇게 한 번 정해진 정통은 그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진리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자기보존논리를 구사하기 마련입니다. 이단이라는 딱지는 그렇게 생산되는 것이고, 그 이단이라는 단어는 조금전에 설명한 바와 같이 이미 사회적 설득력을 잃게 되었는데, 21 세기에는 주로 한국에서만 위력을 발휘하는 지극히 Koreanic 한 용어로 협의화 (挾義化) 하는 중 같습니다.

이단이라는 것도 나라와 문화에 따라 그 위치가 뒤바뀌어 있는 현상이 또한 주목할 만해서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제가 지금 저녁 약속 (여기는 현재 토요일 오후 4 시 40 분)이 있어서 나가 봐야 하기 때문에 이만 쓰겠습니다. 제가 이병휘 목사님의 31 년 전 사진을 가지고 있으므로 기회되면 스캔해서 올려보도록 하겠습니다.

한 가지,,, 본문은 정인구 목사님의 올린 질문글만을 자료로 삼아 작성한 것이므로 그 글에 표현된 문장들을 바탕으로 그 글 (그 분이 아니고)~~~~만을 염두에 두고 쓴 글이지 기장의 다른 교역자 일반의 신학 수준을 염두에 두고 쓴 굴이 아니라는 점을 따로 밝혀 둡니다. 생각지도 않게 신학 수준을 말씀하시기에 드리는 사족입니다. 근데 신학에 수준이 있나요? 고백문학이 아닌 역사로 받아들이고 있는 분들이 기분나빠하시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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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구(경기중부노회,,목사) 2013-02-24 (일) 15:35 7년전
강현님의 글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합니다.
참 잘도 빠져나간다.
또하나 남의 확고부동함을 이야기하지만 강현님은 더욱더 확고부동한 생각을 이상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고 생각되네요.
대화와 토론의 여지없이 질문이 아닌 단정의 의지를 가지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건 님의 전매특허가 아닌가 싶습니다.
이곳이 기장의 게시판이라면 최소한 진보든 보수든 무관하게 성경을 바탕으로 이야기되어야할 곳입니다. 그런데 님에게는 성경의 바탕이 보이지 않는군요.
대부분의 교역자들에게 소통의 장막을 느꼈다는 위의 글과 기장의 다른 교역자들의 일반의 신학수준의 염두에 뒀다는 말씀은 굉장히 부딛히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아마 제가 밝힌 이야기들이 모든 목사, 기장이 아닌 모든 교단의 목사들의 일반적인 신앙고백일겁니다. 이걸 조사했나라고 묻지마십시오. 괜한 시비일뿐이니...
이단의 규정이 권력에 의해 판가름 나는 것처럼 말씀하신 글들이 있는데 그런 일부의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단은 성경이 아닌 다른것, 또는 성경이 말하지않는 다른것을 말하는게 이단입니다. 고로 님의 사상이 이단입니다. 성경에서 출발해서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를 하십시오. 성경이 아닌 다른것에서 출발해서 성경을 말씀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말하면 아무리 대단한 분도 다른 이야기를할 수밖에 없고 그게 이단입니다.
강현님은 아직도 제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회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쓸데없이 이름을 거명하고 분란을 야기시키는사람으로 말씀을 하시는군요. 그런데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교회파괴론자라고 또는 그렇게 지칭받고 있다라고 소개를 하신 분이 분란을 야기시키는 분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으로 서로간의 설전은 마치는게 좋을듯 싶습니다. 어찌되었든 강현님도 기독교인임을 스스로 표방하시는 것 같기도 하니 쓸데없이 에너지를 낭비할 필요는 없을 듯 싶구요.
끝으로 위에 이목사님이 써놓으신 글중에 "마지막으로 강현님은 세상에 많은 선한 기독인들을 만나보셨습니까? 그들의 삶의 노래를 들어본 적은 있습니까? 님의 말처럼 늘 그렇게 고난과 경건만을 추구하진 않습니다. 고리타분한 정신세계와 생활태도를 지닌 기독인의 모습으로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이렇게 설명을 덧붙이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을 돌이켜 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왕이면 그 자리를 몸으로 체험해 보시기를 부탁합니다.
주소
이병휘(전북동노회,전주소망교회,목사) 2013-02-24 (일) 17:08 7년전
서로의 말꼬투리를 물고 늘어지는 식의 감정적 대화는 논지를 흐트러뜨림으로 혼란과 비난을 불러들이기에 바람직하지 않은 자세라고 봅니다. 이 말은 어느 한 개인이나 특정인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이 기장게시판을 통하여 이전부터 지금까지 올려진 대화의 내용을 보면서 느껴왔던 것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화자의 어떤 말을 통하여 드러나는 부분적 이해를 가지고 화자의 전체를 논할 수 없음으로 많은 대화가 필요하지 않은가 생각해 봅니다. 대화에 있어 논지를 벗어났으면 제자리를 찾아가는 대화, 명확하지 않음으로써 오해의 틈이 보이면 질문을 통하여 명료화고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대화, 몰랐을 때엔 그저 아하~! 그랬군요. 인정해주는 대화, 섣불리 판단하기 전에 상대방의 논거를 성찰해 보는 대화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대화에 있어 감정적 대응으로 살벌하고 마음이 상한 대화보다는 서로에게 힘이 되고 알아가는 자리였으면 합니다. 대화의 과정에 있어서 때로는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한 부분에 대한 지적이 아픔으로 다가올지라도 이를 계기로 알아가는 기회로 여긴다면 더욱 발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마음을 열면 새로운 세계가 보이고 새로운 세계에 들어가면 이전에 갖지 못한 새로운 통찰력을 얻는 기쁨이 생길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강현님의 글이 점점 수정에 수정을 가하며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처음엔 솔직히 gossip거리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어줍잖은 지식으로 현학적인 태도를 취하며 교역자들을 꾸짖고 교회를 우롱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경솔이라는 단어를 쓴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 마음을 알았고..., 속상했다면 미안합니다. 그리고 31년전 사진을 보고 싶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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