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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여성에 관한 교회의 거짓말 잔혹사

강현 (기타,,신도) 2013-02-11 (월) 06:07 7년전 6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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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수사와는 별도로 예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다.
로만카톨릭은 왜 예수 선생의 생모로 알려진 마리아를 특별한 위치로 격상시켰을까? 
싸르니아는 예전부터 여기에 대한 잠정적 해답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 선생의 가장 우수했던 수제자 마리아 막델리나를 격하시키는 맞불도구로 삼기 위해 생모 (biological mother) 마리아를 신학적으로 이용했을 가능성이 압도적이라는 추측성 해답이 그것이다.
적어도 AD 5 세기 에페소 공의회를 전후해 생모 마리아의 신격화를 주장했던 주교들은 또 다른 마리아, 즉 수제자 마리아의 망령이 밤마다 꿈자리에 나타나서 괴롭히는 바람에 늘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을까?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가장 위험시했던 인물은 지적 영적 수준에서 남성을 뛰어넘는 우수한 여성이었다.
그들에게 위협이 되는 ‘위험한 여성’, 즉 능력있는 여성의 부각을 막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무엇이었을까? 
위험하지 않은 여성, 즉 평범한 여성을 신화적으로 부각시켜 위험한 여성을 제압해 버리는 이女치女 전법을 구사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을 것이다
오랜 시일이 흐른 뒤에는 두 여인의 나이 차이같은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된다. 오히려 나이 차이보다는 이름이 중요한데 두 여인의 이름이 같으니 이女치女 전법에서 이보다 더한 안성맞춤은 없다.  
교회는 수제자 마리아 막델리나의 특별한 역할이 기록되어 있는 The Gospel of Philips 같은 불온문서들을 없애버리는 고강도 탄압작전과는 별도로 마리아 막델리나가 가지고 있는 수제자 이미지와, 선불교 사상에 가까운 예수의 진짜 메시지를 요란하지 않게! 드러나지 않게!! 조용히!!! 대중의 뇌리에서 귀신도 모르게 제거해 나가는 저강도 심리전 공작을 별도로 수행했다. 
초기 기독교 교부들은 마리아 막델리나가 아둔한 베드로 같은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중요한 위치에서 예수 운동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은 마리아 막델리나가 예수 선생과 특별한 관계 (이를테면 애인관계)였다는 기록같은 것은 별로 위험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예수 선생이 다른 제자들과는 나누지 않은, 차원이 다를 정도의 수준높은 토론들을 마리아 막델리나와 나누었다는 기록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했다.
그들은 교회에서 여자가 지도자가 되는 것을 꿈에서조차 상상할 수 없는 남성우월주의자들이었다.
그들은 여성 수제자의 등장 뿐 아니라, 예수 선생의 진짜 메시지, 즉 영적 자아로서의 를 온전하게 깨닫는 것에 의해 하나님 나라를 이룩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 대중적으로 확산되는 현상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했다.
만일 이런 사상이 전파되면 구원의 매개자로서 교회의 권력과 존재기반이 그 자리에서 무너지기 때문이었다. 그 '위험한 사상'의 중심에는 마리아 막델리나가 있었던 게 거의 확실하다.
싸르니아의 수사결과에 의하면 예수 선생의 진짜 메시지를 알아들었던 제자는 두 사람이었는데, 그 중 한 명이 ‘The Gospel of Thomas’ 의 저자인 토마였고 또 다른 한 명이 마리아 막델리나였다.   
어쨌든 싸르니아는 초기 교회권력이 마리아 막델리나의 부각을 결사적으로 저지하기 위해 수행했던 심리전 도구의 하나로 느닷없이 등장시킨 생모 마리아를 조사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예수의 부모로 알려진 요셉과 마리아란 실제 존재했던 인물들이 아니라 창작된 가공인물들 (fictionalized composites)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수제자 마리아 VS 생모 마리아,,,
이 두 여성을 미묘하고도 숙명적인 견제관계로 만들어 놓은 교회권력의 신학적 조작, 그 역사적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출생과 그 이후의 기록과정에 대한 현장조사가 필수적이다.  
초기 기독교권력이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편집해 놓은 경전의 순서들로 말미암아 신학에 별로 조예가 깊지 않은 우리같은 평신도들이 무심코 지나치는 사실이 있는데, 경전 기록 중 가장 먼저 기록된 문서들은 마가(마르코)복음을 비롯한 네 복음서가 아니라 바울의 서신들이라는 것이다.
바울서신들은 대체로 예수가 죽은 후 20 년에서 30 년 전후에 작성됐는데, 이 문서들 어느 구석에도 예수 부모에 대한 언급이 없다.
이 이야기는 다시말해 바울이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커녕 예수의 부모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정황증거다.
심지어 초기 기독교권력에 의해 정경으로 채택된 마가복음조차 예수의 출생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출생과 관련된 부모 이야기도 없다.
그렇다면 네 복음서 중 가장 먼저 작성된 문서인 마가의 기록자 역시 예수의 부모라든가 그의 출생배경에 대해 잘 몰랐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누가 예수의 부모 이야기와 동정녀 탄생 이야기를 가장 먼저 언급했는가?
마태오복음의 기록자가 가장 먼저 언급했다. 현재까지 발견된 문서들 중에 그렇다는 말이다.
Matthew 의 기록자가 예수의 출생과 부모 이야기를 드라마틱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그가 창작해 낸 이야기 중 제일 중요하고 유명한 동정녀 탄생 이야기는 예수 선생의 신성을 담보하는 역할 뿐 아니라 그의 생모 마리아에게 특별한 위치를 부여할 수 있는 신학적 근거가 된다.
오늘의 수사대상은 아니지만 기왕 말이 나왔으니 마태오복음 이야기를 좀 하자. 일단 마태오복음의 기록자가 Matthew 라고 치고 이야기를 전개하겠다.
우선 싸르니아는 Matthew 라는 사람의 놀라운 상상력에 감탄사를 연발하지 않을 수 없다.
Matthew 는 어떻게 해서 이런 이야기를 창작하게 되었을까?
요즘도 이런 사람들 많다. 틈만나면 모니터앞에 죽치고 앉아 이런 저런 이야기하길 즐기는 사람들,,,,,,
지금으로부터 2 천 년 전에도 그런 사람들이 있었다.
당시 컴퓨터는 없었지만 파피루스 두루마기 같은 곳에 쓰여진 문서들을 모아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이리저리 연구하고 이야기를 첨삭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Matthew 도 바로 그런 과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부정적인 시각에서 하는 말이 아니다. 역사란 이런 과에 속하는 사람들에 의해 어느 쪽으로든 움직이게 되어있다.) 
서기 80 년 이후 어느 따뜻한 봄 날,
Matthew 의 책상 위에는 한 뭉치의 문서가 놓여있었다. Mark 라는 사람이 쓴 문서였다.
Matthew의 눈에 Mark 가 쓴 문장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영어 문서에는 이렇게 나와있다.
“Is this not the carpenter? The son of Mary, and bother of James, Joses, ……
싸르니아 수사본부는 이 문장에서 매우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당시에는 어떤 사람을 보고 어머니의 이름을 거명하며 누구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법은 없었다. 반드시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게 되어 있었다.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다른 네 형제의 이름을 거명하며 그들의 형이라고 한 것은 예수선생과 나머지 네 형제가 이복형제지간임을 강하게 암시하고 있다. 그들은 같은 마을에 살았으면서 예수 선생의 생부가 누구인지 전혀 몰랐다는 사실도 드러내 주고 있다. 
이 사건은 예수 선생이 자기가 자란 고향에 갔을 때 벌어진 사건이었는데, 신학자들은 예수 선생이 마리아의 ‘비합법적 임신’을 통해 출생했을 거라는 추정을 한다.
Matthew Mark 가 기록한 바로 이 문장을 토대로 그 자리에서 소설쓰기에 착수했다.
우선 Matthew 는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인물 한 명을 창작했다.
그는 그 가공인물의 이름을 요셉이라고 불렀다.
Matthew 소설에서 등장한 요셉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그는 자신의 약혼녀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도 이를 문제삼지 않고 조용히 파혼하려던 찰라 ! 하나님이 꿈에 나타나 “네 아내는 성령 (Holy Spirit)으로 잉태한 것이니 두려워 말고 아내로 맞으라, 아이가 탄생하면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 아이가 장성하여 그의 백성을 구원할 것이다” 라고 하신 말씀을 꿈속에서 다소곳이 듣는 역할을 맡은 것이다.
마리아의 ‘비합법적 임신’ 사건이 ‘성령에 의한 잉태 신화’, 다시 말해 동정녀 탄생신화로 화려하게 재탄생하게 된데는 당대의 더큐멘터리 소설가 Matthew 의 탁월한 상상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분명한 것은 그가 창작소설가가 아니라 더큐멘터리 소설가였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쓴 소설 중 어디까지가 역사적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창작물인지 구별해내야 하는 매우 피곤한 작업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점이다.
기원후 4 세기 경, 이른바 신약성서가 편집될 때, 당시 편집자들은 Matthew 의 문서를 가장 첫 장에 배치시켰다. 이 문서야 말로 성서 지식이 없는 일반 신자들을 동화적 믿음으로 결속시키는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판단은 적중했다.
그렇다면 예수의 생부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싸르니아 수사본부는 첫번째 참고인으로 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서 종교학과 고고학을 함께 연구하는 제임스 D 타보 박사를 소환했다.
타보 박사는 대학 연구실과 강의실에서 눈으로만 흝어보고 입으로만 나불대는 학자가 아니라 실제로 고대 무덤을 비롯한 종교 유적지들을 직접 탐사하면서 고고학적 과학수사기법으로 증거들을 수집하는 성실한 전문가이기때문에 증언이 믿을만 했다.
암튼 제임스 D 타보는 예수의 생부가 유대 고대문헌 탈무드에 그 이름이 언급되는 로마군 병사 티베리우스 율리우스 압데스 판테라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추정했다.
판테라 생부설은 새로운 것은 아니고 이미 AD 3 세기 중반 켈수스-오리겐 논쟁으로 다루어 진 적이 있는데, 판테라 생부설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이 이론이 이미 낱낱이 반박된 낡은 이론 (남코리아 조직신학자 허호익 교수의 서면 증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싸르니아 수사본부가 주목하는 것은 판테라가 예수 선생의 생부냐 아니냐 여부가 아니라, 생모 마리아와 요셉이 예수의 부모로 경전기록에 출몰하게 된 배경이 무엇인가 하는 문제이므로 생부추적은 하지 않기로 했다.   
(수사보고서 용량한계인 A4 네 페이지를 다 채웠으므로 오늘은 여기까지…… ) 
 2013. 2 .10 sarnia (CSI)

강현(기타,,신도) 2013-02-12 (화) 10:38 7년전
넵, 주말에 당장 도서관에 가서 찾아보겠습니다.
보그와 크로싼은 공저가 많군요. First Paul 도 그들이 같이 쓴 거 아닌가요?
요즘은 성서학에 관련된 분야보다는 선불교쪽에 줌 더 관심이 가긴 합니다.
기장 소속 교회현장에서도 좋은 첵들이 소개되어 평신도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하면 좋겠습니다.
WCC 대회가 한국에서 열리는가보군요.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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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기타,,신도) 2013-02-12 (화) 11:31 7년전
작년에 Pagels 교수가 쓴 Beyond Beleif 를 읽으면서 누가 번역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선불교에 대한 관심은 이 책 어딘가에서 Pagels 가 선불교로 개종한 어느 기독교인을 인터뷰한 내용을 읽고나서 가지게 되었지요. 아마 그 서양인은 이런 이야기를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내가 'the Gospels of Thomas를 좀 더 일찍 알았더라면 선불교로 개종할 필요는 없었을 거"라고,,
아, 그래서 예수 선생이나 선,, 또는 불교의 핵심 가르침은 다 같은 거구나 하는 생각을 했지요.

올해는 사실 북코리아의 군사퍼레이드나 아리랑같은 집단표현예술이 나중에 평화시대가 온 후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인류문화유산으로 추천할만한 문화사적 가치가 있는지 구경하러 갈 예정이었는데, 지중해와 유럽의 기독교 사적지에도 꼭 가보고 싶다는 마음이 듭니다.
주소
강현(기타,,신도) 2013-02-12 (화) 12:13 7년전
아, 제가 Pagels 의 BB 를 읽고 독후감을 써서 여기 올린 걸 깜빡했군요. 캐나다 사이트에서 어느 분과 이야기 나누다 생각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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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 때문에 절교하고 헤어졌던 친구와 오해가 풀려 다시 해후하는 마음은 어떤걸까?

그런 경험 없어 잘 모르겠다.

기독교의 전통 교리에 실망한 나머지 불교로 개종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본래의 예수의 이야기와 불교가 추구하는 진리의 본질이 다를 게 없더라는 걸 깨달았을 때 그 사람이 맞이하는 종교적 환희는 어떤걸까?

이것도 난 잘 모르겠는데 이런 경우 무지 많은 듯 하다.

여기 모태 신앙 기독교인이 있다.

그는 보스턴 출신의 미국인이다. 그는 성인이 되어 자기 종교와 결별하고 불교로 개종했다. 기독교에서 불교 등 동양종교로 개종한 서양인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 역시 전통 기독교의 구원론에 영적 설득력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에 개종을 결심한 것이었다. 그는 일본의 교토로 가서 선불교의 Shunryu Suzuki Roshi의 제자가 됐다. 그의 이름은 리차드 베이커 (Richard Baker)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이런 말을 했다.

“But,” -he laughed- had I known the Gospel of Thomas, I would not have had to become Buddhist”

그의 이 말은 직역하는 거 보다는 조금 의역이 필요한데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토마복음을 비롯한 나그함마디문서의 진가를 그가 진즉 알았더라면 사복음서를 비롯한 성서와 예수에 대한 이해를 좀 더 정확하고 풍부하게 했을 것이고, 만일 그랬다면 그가 굳이 불교로 개종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베이커 스토리는 요즘 읽고 있는 일레인 페이절스의 ‘Beyond Belief’ 에 소개되어 있다. 베이커를 센프란시스코의 어느 선불교 명상센터에서 만난 페이절스는 ‘he laughed’ 라는 필자주를 넣어 그가 불교로 개종한 것을 후회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다만 베이커는 자기의 옛종교 기독교가 종교다운 모습으로 거듭나 줄 것 같아 기쁜 모양이다.

사실 무슨 소리를 둘러대도 전통 기독교 교리에 바탕을 둔 구원론은 파당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파당적인 것과 보편적 진리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이것은 교리의 비과학성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인간에게는 유무식을 막론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자아와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무한욕구가 있다. 이런 무한욕구를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기원후 4 세기 경 일부 교권주의자와 특정지역의 정치권력이 만들어 놓은 구원론은 마치 그 무한욕구를 포기하고 누군가에게 ‘길 찾는 사명’을 내맡겨 버리라는 말과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다. 나는 갑자기 이런 패러디 ‘명언’을 하나 만들고 싶다. (비록 "회의는 이성의 쉼터다" 란 말을 패러디한 거긴 하지만 sarnia 가 새로 개발한 말이니까 저작권을 존중해 주시기 바란다)

‘기독교의 전통 구원론’은 진리와 본질을 추구하는 인간 영성의 쉼터다.

(이성이라고 하지 않고 분명히 영성이라고 했다,)

즉 잠시 힘든 다리를 쉬어갈 수 있는 장소는 되지만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는 쉼터라는 것이다.

물론 베이커의 경우와는 반대의 경우도 드물지만 존재한다.

이어령의 경우가 그렇다. 공교롭게도 이어령과 베이커는 일본의 교토에서 무엇인가를 찾았는데 전혀 다른 걸 찾았다. 베이커는 기독교에서 불교로, 이어령은 지성에서 영성으로 (자기 말에 따르면) 각각 엇갈린 길을 간 것이다.

이어령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혹시……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이어령이 저 자기의 명언을 이렇게 고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의문이 지성을 낳는 건 맞는데,

믿음은 영성과 구분이 난해한 광신을 낳고,

믿음을 넘어설 때 비로소 진짜 영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오해 때문에 절교하고 헤어졌던 친구와 오해가 풀려 다시 해후하는 마음은 어떤걸까?

그런 경험 없어 잘 모르겠다.

기독교의 전통 교리에 실망한 나머지 불교로 개종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본래의 예수의 이야기와 불교가 추구하는 진리의 본질이 다를 게 없더라는 걸 깨달았을 때 그 사람이 맞이하는 종교적 환희는 어떤걸까?

이것도 난 잘 모르겠는데 이런 경우 무지 많은 듯 하다.

여기 모태 신앙 기독교인이 있다.

그는 보스턴 출신의 미국인이다. 그는 성인이 되어 자기 종교와 결별하고 불교로 개종했다. 기독교에서 불교 등 동양종교로 개종한 서양인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그 역시 전통 기독교의 구원론에 영적 설득력의 한계를 절감했기 때문에 개종을 결심한 것이었다. 그는 일본의 교토로 가서 선불교의 Shunryu Suzuki Roshi의 제자가 됐다. 그의 이름은 리차드 베이커 (Richard Baker)다.

그런데 그가 나중에 이런 말을 했다.

“But,” -he laughed- had I known the Gospel of Thomas, I would not have had to become Buddhist”

그의 이 말은 직역하는 거 보다는 조금 의역이 필요한데 나는 이렇게 이해했다. 토마복음을 비롯한 나그함마디문서의 진가를 그가 진즉 알았더라면 사복음서를 비롯한 성서와 예수에 대한 이해를 좀 더 정확하고 풍부하게 했을 것이고, 만일 그랬다면 그가 굳이 불교로 개종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베이커 스토리는 요즘 읽고 있는 일레인 페이절스의 ‘Beyond Belief’ 에 소개되어 있다. 베이커를 센프란시스코의 어느 선불교 명상센터에서 만난 페이절스는 ‘he laughed’ 라는 필자주를 넣어 그가 불교로 개종한 것을 후회하는 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다만 베이커는 자기의 옛종교 기독교가 종교다운 모습으로 거듭나 줄 것 같아 기쁜 모양이다.

사실 무슨 소리를 둘러대도 전통 기독교 교리에 바탕을 둔 구원론은 파당적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파당적인 것과 보편적 진리는 궁합이 맞지 않는다. 이것은 교리의 비과학성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인간에게는 유무식을 막론하고 진리를 추구하고 자아와 우주의 본질을 이해하려는 무한욕구가 있다. 이런 무한욕구를 가지고 있는 인간에게, 기원후 4 세기 경 일부 교권주의자와 특정지역의 정치권력이 만들어 놓은 구원론은 마치 그 무한욕구를 포기하고 누군가에게 ‘길 찾는 사명’을 내맡겨 버리라는 말과 다른 점을 찾을 수가 없다. 나는 갑자기 이런 패러디 ‘명언’을 하나 만들고 싶다. (비록 "회의는 이성의 쉼터다" 란 말을 패러디한 거긴 하지만 sarnia 가 새로 개발한 말이니까 저작권을 존중해 주시기 바란다)

‘기독교의 전통 구원론’은 진리와 본질을 추구하는 인간 영성의 쉼터다.

(이성이라고 하지 않고 분명히 영성이라고 했다,)

즉 잠시 힘든 다리를 쉬어갈 수 있는 장소는 되지만 영원히 머무를 수는 없는 쉼터라는 것이다.

물론 베이커의 경우와는 반대의 경우도 드물지만 존재한다.

이어령의 경우가 그렇다. 공교롭게도 이어령과 베이커는 일본의 교토에서 무엇인가를 찾았는데 전혀 다른 걸 찾았다. 베이커는 기독교에서 불교로, 이어령은 지성에서 영성으로 (자기 말에 따르면) 각각 엇갈린 길을 간 것이다.

이어령은 이런 명언을 남겼다.

“의문은 지성을 낳고 믿음은 영성을 낳는다”

혹시…… 세월이 좀 더 지나면 이어령이 저 자기의 명언을 이렇게 고치는 날이 오지 않을까?

“의문이 지성을 낳는 건 맞는데,

믿음은 영성과 구분이 난해한 광신을 낳고,

믿음을 넘어설 때 비로소 진짜 영성이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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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종화(,강진읍교회,목사) 2013-02-13 (수) 17:36 7년전
저는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님이 아닙니다.  저는 제주 동부교회 박종화 목사입니다.  존경하는 박종화목사님과 이름이 같아서 혹여라도 폐를 끼칠까봐 가급적이면 교회일이 아니면 글을 남기지 않으려고 애써왔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강현님의 두 글을 보면서 침묵만을 할 수는 없어서 짧게나마 글을 남기고 싶습니다.

그동안 강현님이 보여주신 좋은 모습들에 공감할때도 있었지만, 가끔씩 이렇게 본인을 무슨 수사관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남기신 글들에는 많은 문제점들이 있어보입니다.  위의 임홍빈 목사님도 지적하셨지만, 강현님이 이야기하는 신화니  하는 내용들은 이미 신학과 1,2학년시절에 저희들도 익히 공부하고 또 고민했던 내용들입니다.  그러나 이미 신학적이든, 신앙적이든 극복하고 또 체계화하고, 목회현장에서 열심히 확신과 기쁨으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엘에이 유학시절에, 진보적이라는 미국장로교단의 교회에서 협동목사로 사역을 한 적이 있었는데요, 그때 운동권출신의 한 청년이 샌프란시스코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서 1,2학기를 보내면서 했던 이야기들이 지금 강현님이 하는 이야기들과 유사한 내용들이었습니다.  그분도 이제는 졸업할때가 다 되었고 지금은 보다 더 폭넓은 신학이해를 통하여 함부로 신학 그리고 신화에 대한 이야기들을 하지 않더군요.  그러나 그분도 신학대학원 초창기때는 교회에서 어떻게든지 자신이 배운 진보적인 (?)신학적 이야기들을 성도들에게 하고 싶어서 못 견뎌하더군요.  덕분에 저는 일반성도들과 성경공부를 할때마다 더 많은 공부를 하고 가르쳐야만 했었지요. 

저는 지금의 총회게시판이 신학대학 게시판이라면 얼마든지 강현님의 글같은 글들이 올라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학하는 사람들은 처절히 고민을 해야하고 더 많은 책을 읽어야 하고, 그래서 그 단계를 넘어서 신학적인 체계를 세워나가야 하니까요. 그러나 이곳은 총회게시판이요, 목회현장의 일환이며 성도들의 대화의 장소입니다. 저는 이 장소에서는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말씀을 나누기에도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한가지 더, 밑에 있는 뱀에 관한 글은 뱀에 대한 덕담이라고 치부하시니까, 그정도로만 이해하겠습니다.

그러나 사실 창세기에 나오는 뱀은 동물로서의 뱀이 아니라 인간을 원죄로 내 몰았던 사탄을 상징한다는 것쯤은 잘 아실 것입니다. 그 뱀이 인간을 미혹시켜 원죄를 짓게 한 것을 오히려 선악을 알게 해준 공로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원죄에 대한 이해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부활 그리고 종국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한 인류구원까지도 부정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점은, 강현님이 다니는 교회는 어떤지 몰라도, 우리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원죄와 십자가사건 , 부활,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고백하는, 복음적인 고백위에 서있는 교단이요, 교회라는 사실입니다. 저는 그 복음적인 한국기독교장로회 제주노회 제주동부교회의 담임목사입니다.

저는 강현님을 잘 모릅니다. 그냥 막연히 선배님인가? 하는 정도였습니다. 박식한 지식에 대단하다는 생각도 했었구요. 그러나 이제는 강현님께서도 강현님이 읽었던 그런류의 책보다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진지하게 읽어보시는 것이 어떨까 생각됩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더이상 선생으로서가 아니라 준님으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서로 고백할 수 있다면 강현님에게는 최고의 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주소
     
     
박종화(,강진읍교회,목사) 2013-02-13 (수) 17:41 7년전
밑에서 두번째 줄에 있는 준님을 주님으로, 맨밑의 글 서로를 로서로 정정합니다.(수정하는 기능을 찾지 못해서)
주소
강현(기타,,신도) 2013-02-13 (수) 23:44 7년전
XXX 교수님과 박종화 목사님, 두 분 안녕하세요. XXX 교수님은 반갑습니다. 정말 오랜만이군요.

아침이라 시간이 없어 간단하게 인사만 드리겠습니다. 우선 이 글은 기장에 소속된 교역자들을 상대로 논쟁을 유발하기 위해 작성한 것이 아니니까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가 줄곧 이야기하지 않았나요? 제가 올리는 글 중 신학과 관련된 문제는 교역자들일 경우 학부에서 다 접한 것일테니 굳이 읽을 필요없다고요.

다만 평신도들은 과연 이런 문제들에 대해 교역자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서석에서 질문해보라고 언급한 적은 있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대부분의 신학적 질문들은 논쟁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고민의 대상일 것 입니다. 신학자들의 전유물일 수도 없습니다. 만일 신학자이면서 교역자인 두 분께서 신학이 신학자나 교역자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한다면 천부당만부당한 착각이라는 것 부터 분명히 합니다. 물론 두 분이 그런 사고를 하는 분들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아울러 저는 지금까지 제가 올린 글들은 ‘신학 주제’라기 보다는 삶의 이야기 이면서 동시에 인문학적 상식에 속하는 대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제가 신학에 관심이 많다고 표현하시는 것도 적절치 않은 표현입니다.

무엇보다도, 이런 문제들은 쇼킹한 문제도 아니고 학부에서 공부했을때는 새로운 것이었는데 어른이 되고보니까 별 것 아니었더라 하는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아주 곤란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것은 매우 떳떳하지 못한 자세라고 생각합니다.

신학 주제들은 신학대학 게시판에 가야지 다른 일반 게시판에서 논의하는 것은 안 된다는 식의 말씀도 어이가 없습니다.

신학하는 사람들만 신학에 대해 처절한 고민을 해야하고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처절한 고민들 구경만 해야 한다는 건가요? ...... ^^

그리고 어른이 되면서 인식이 변화했다는 말씀도 그렇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왜 그런 인식의 변화가 일어났는지 설명이 있어야 합니다. 그 설명은 신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개인의 신앙에 관련된 문제일 것 입니다. 따라서 다른 신앙노선을 가고 있는 제삼자에게 무엇이 옳다 그르다 결론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겠지요.

이거 아주 기본 중의 기본 아닌가요?

저는 왜 두 분이 (특히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XXX 교수께서) 왜 이런 판에 박은듯한 무리한 댓글을 올리셨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비슷한 시간에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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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현(기타,,신도) 2013-02-14 (목) 11:04 7년전
XXX 교수님께서 올리셨던 댓글을 삭제했으므로 이름을 XXX 로처리합니다.
댓글을 삭제해달라는 의미이신 듯 하지만, 제 댓글은 그 분 한 분에게가 아닌 박종화 목사님께도 같이 올린 통합댓글이므로 삭제는 불가능함을 알려드립니다. 

여기 댓글주신 박종화 목사님은 경동교회 박종화 목사님이 아니라 다른 박종화 목사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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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우성(서울남노회,프랑스파송선교사,목사) 2013-02-16 (토) 06:55 7년전
오랜 만에 게시판에 들어왔더니(저는 주로 예배 시간에 쓸 이달의 기도를 찾아 사이트에 들어옵니다) 전에도 본 듯한 약간의 소란이 있는 것 같아 한 말씀 올리겠습니다.
어떤 글이든 글을 쓸 때, '목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강현님도 목적을 가지고 글을 쓰실텐데,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평신도를 깨우겠다' 정도의 취지이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제자훈련은 아니니까, '평신도들이 박제화된 도그마에 갇혀 있지 않을 수 있도록 신앙적 사유의 지평을 넓히는 문제의식을 고취하겠다' 정도가 강현님의 취지로 보입니다.
도그마 배격이란 넓게 보아서 기장성의 기초 중 하나일 수 있으므로 취지 자체에 대해서는 별도의 이견을 표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그간 있었던 소란을 통해 얻으신 학습효과가 없어 보인다는 것은 지적을 하고 싶습니다. 글을 쓰시는 목적이 "교역자들을 상대로 논쟁을 유발하기 위해"는 아니라고 말씀하지만, 실제로는 주로 교역자들과 충돌을 하고 있는 양상입니다. 강현님 스스로 글을 쓰시는 내면의 목적을 돌아보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견을 말씀드리면, 올리시는 글과 문제의식이 우리나라 교회 평신도들 다수에게 유익하지는 않을 것 같고, 성경에 대한 축자적 맹신을 반성할 수 있는 기회가 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성경 구절을 문법에 맞게 바르게 독해하는 분도 많지 않은 것이 현실 같습니다. 하물며, 문맥에 따른 의미 분석이나 행간을 읽는 수준은 먼 경우가 많다고 보입니다. 즉, 성경 내에 있는 복음적 메시지조차 잘 읽지 못하는 것이 우리나라 교회의 평신도 상황이라고 할 때, 성경 밖에서 성경의 기초에 도전하는 듯한 내용을 열거한들 원하는 효과를 보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특히나 인터넷의 발달과 안티의 창궐 덕분(?)에 말씀하시는 류의 내용들을 직간접적으로 부정적인 정서 속에서 경험한 교인들이라면 강현님께서 올리시는 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지나쳐 버릴 것입니다. 뜻하시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접근 방법을 돌아보셔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 주의 깊게 읽고 있으신 책들을 쓴 사람들도 나름의 '목적'이 있을 것인데, 그것이 '한국 교회 평신도 각성'은 아닐 것입니다. 저자가 어느 교파인데 어느 교파를 직접적으로 곤란하게 할 수 있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가에서 저자의 글 쓴 목적을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순수한 진리에의 추구'가 없지는 않겠지만, 그것을 보장하는 울타리 내에서 하고 있으니 강의도 하고 교수도 하고 저술도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는 아니라도 많은 경우에는요. 이렇게 그들만의 리그를 분별해 보는 것도 의외의 재미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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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미정(기타,한길교회,집사) 2013-02-16 (토) 08:22 7년전
역사에도 사실이 있듯이 성서에도 사실이 있습니다. 모든 사실이 역사가 될 수는 없습니다. 기록의 역사가 되었다는 것은 쓴 사람의 관점이 들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로의 생각과 사고를 교리나 어떤 도그마로 단정 짓기 전에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구나! 하면, 격한 언어를 쓸 필요도 없을텐데 하는 생각도 합니다. 강현님이 말한 것처럼, 바울 서신이 먼저 쓰여지고, 복음서는 후대에 쓰여졌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에 나오는 부활이야기를 보면, 마리아가 먼저 나옵니다 (바울 서신에는 게바가 먼저). 그리고 도마가 예수님을 확인하는 이야기도 나옵니다. 교회에서는 흔히 도마를 의심 많은 사람으로 단순하게 치부하는데, 그것이 아니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당대에 부활을 목격한 마리아는 교회 공동체에 베드로에 머금가는 영향을 끼쳤다고 보기도 한답니다. 마찬가지로 도마 역시 그렇다는 것입니다. 도마의 신앙은 부활한 예수를 철저히 손가락으로 확인한 신앙입니다. 의심많은 신앙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참고로 미국에서 같은 신학교에서 같은 신학을 배우고 한국으로 돌아와서 동지에게 '저 사람은 자유신학을 하는 사람이오' 라고 했다는데, 사순절에 기독교적 도그마는 잠시 내려놓고 강현님의 글을 보면서 상상해보고, 다시 도그마를 집어 들어도 자기가 걸어가야할 신앙 길에 그다지 나쁠 것은 없다고 봅니다. 하나님은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 살아계시니, 성령을 따라 생동하는, 살아움직이는 신앙 생활을 하면 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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