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선하심(טוּב יְהוָה)에 대한 묵상(이영미)
히브리어 중 일반인에게도 가장 친근한 단어 중 하나가 טוֹב(토브)이다. ‘토브’라는 이름의 카페와 식당이 눈에 띌 정도로 한국에서도 보편적으로 알려져 있다. 기본적인 뜻은 “좋은”, “선한”, “기쁜”, “아름다운”, “유익한” 등을 포함한다. 히브리성서에는 562번 등장한다.
구약원어신학사전(TWOT)은 토브의 의미를 다섯 가지 분야로 분류한다. 1)실제적, 경제적, 물질적인 선(유익), 2) 소망, 기쁨, 아름다움 등과 같은 추상적인 선, 3) 좋은 품질, 고급스러움, 4) 도덕적인 선, 그리고 5) 철학적 선 등이다. 히브리성서에서는 창세기 1장의 창조 본문에 처음 언급된다. 하나님은 창조물을 보시고 “토브”라는 표현을 7번 사용하고(1:4, 10, 12, 18, 21, 25, 31)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하신 후 매우 좋다(1:31)고 말씀하신다. 창세기 1장의 토브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이 본래 ‘좋다’는 창조적 선함(creative goodness)를 표현한다.
이번 묵상에서는 토브가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적용된 사례를 중심으로 그 의미를 성찰하고자 한다. 토브가 하나님에게 적용될 때는 인간이나 사물에 적용될 때보다 훨씬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선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선함의 근원, 즉 선 자체이다. “야웨는 선하시다”(시 100:5)는 고백은 하나님이 도덕적으로 완전하고, 신실하며, 인자하고, 자비로운 분을 뜻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시편 25:8은 아싸르(יָשָׁר)와 병치되어 하나님의 선하심을 곧으심과 함께 표현한다. 이는 도덕적인 선함을 뜻한다. 그리고 시편 145:9는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선함과 긍휼하심(רַחֲמִים)의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한다. 스가랴 9:7은 선함을 아름다움과 병행하면서(마-투보 우마-야페이보/ מַה־טוּבוֹ וּמַה־יָפְיוֹ), 선 자체를 말한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심은 하나님이 인간을 향해 보여주시는 옳으심, 긍휼하신 품성을 가리킨다. 선지자 미가는 하나님께서 이미 보여주신 주의 선하심(כִּי־טוֹב יְהוָה)을 인간도 행할 것을 요구하신다고 말하면서,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חֶסֶד),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고 선포한다.
토브는 예배나 찬양에서 하나님의 선하심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쓰인다.(시 23:6; 34:8; 100:5) “하나님의 선하심(טוֹב־יְהוָה)”이 찬양과 신뢰의 근거가 되고(시 100:5; 34:9[8]), 예배 인도자들은 이러한 구절들을 회중이 하나님의 신뢰할 만한 성품에 집중하도록 사용하고, 특권의식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을 갖도록 한다.
어떤 학자들은 명사 투브(טוּב)는 “좋은” “선한”으로 쓰이는 형용사 토브(טוֹב)와 의미가 유사하지만, 뉘앙스에 약간의 차이가 있음을 주장한다. 즉, 형용사는 토브(טוֹב)는 “하나님은 선하시다”라는 진술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적 성품을 말하는 반면, 투브(טוּב)는 “야웨의 선하심”이라는 표현 속에서 그 선함이 흘러나와 주어지는 은혜와 복을 의미한다. 신학적으로 토브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 투브는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의 결과를 말한다. (시 84:11)
칠십인역에서 토브(טוֹב)는 아가토스(ἀγαθός), “좋은, 선한, 유익한,”으로 투브(טוּב)는 아가토쉬네(ἀγαθωσύνη) 또는 크레스토테스(χρηστότης) “선함, 인자함, 친절함”으로 번역되었다. 그리스어 아가토스(ἀγαθός)는 도덕적으로 ‘선한, 의로운’이란 의미의 본질적인 선을 말한다. (예, 마 19:17: “오직 한 분만 선하시다.”) 크레스토스(χρηστός)는 로마서 2:4에서와 같이 관계적 선함(친절한, 온유한, 선한)을 말한다. 아가토쉬네(ἀγαθωσύνη)는 갈라디아서 5:22과 같이 선의 열매, 은혜를 뜻한다.
히브리성서에서의 쓰임과 달리, 토브를 절대선으로 이해하는 경향은 랍비 전통과 초대교부, 그리고 중세 신학에서 발견된다. 랍비 전통에서 토브(טוֹב)는 단순한 도덕적 선함이 아니라, 하나님 존재의 창조적 본질로 이해되는데, 중세 유대 철학자들 (마이모니데스, 유다 할레비 등)에 와서 경험적, 신앙적 선함(자비, 풍요, 복)에서 그리스 철학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선하심”은 존재론적, 형이상학적 개념으로 확장했다. “하나님은 선하시다”는 고백이 “하나님은 완전한 존재이시며, 존재의 근원이시다”로 바뀌었다.
기독교 전통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354-430)가 하나님의 선함을 ‘존재의 충만함(plenitudo essendi)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하나님은 선하시므로 존재하시고, 존재하시기 때문에 선하시다.” 또한 악은 선의 부재이고, 모든 피조물은 그 존재 자체로 선하다. 모든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모든 존재는 그분의 선에 참여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bonum은 히브리어 투브 아도나이(טוּב יְהוָה)를 형이상학적 언어로 재해석하여, 하나님의 선하심을 존재의 충만함이라고 정의한 결과이다. 하나님은 최고선(Summum Bonum)이다. 이는 아퀴나스가 하나님은 선 그 자체이다(Deus est ipsum bonum)라는 설명으로 이어진다.
말하자면, 히브리성서와 칠십인역의 “주의 선하심(טוֹב יְהוָה/ἀγαθὸς κύριος)”이 라틴 신학에서는 bonus/bonitas Dei “하나님의 선함”, 그리고 중세 스콜라 철학에서 “신적 선함/최고선(Summum Bonum)”으로 변청해간다. 그리스-로마 철학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의 인애와 긍휼을 베푸시는 선하심이 존재론적으로 이해되는 경향으로 기울었지만, 히브리성서에서 토브는 인간을 향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자비, 선, 축복)을 묘사하며,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그 선함을 실천하면서 살 것을 요구하신다(미가 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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